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승현 Apr 11. 2022

건달과 연예인 그 사이

“속았어 정말”

“왜? 또”

"나는 오빠가 꾸미는 센스가 있어서 좋아했는데, 그게 다 전 여친 작품이었다니”


 지금의 아내는 나의 첫인상을 크게 착각했다. 내가 헤어와 옷 등을 세련되게 입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와이프를 만나기 전에 패션 디자이너와 사귀었다. 과거의 여친은 회색 운동복에 갈색 구두를 신는 패션 테러리스트에게 직업적 공분을 느끼며 인형 옷 입히기를 시작했다. 나는 로켓 배송처럼 문 앞으로 배달되는 옷을 받아 입었다. 이마를 답답하게 덮고 있던 앞머리도 올렸다. 덕분에 패션 피플은 아니어도 피플처럼은 보였다.

 그 물이 채 빠지지 않았을 때 지금의 와이프를 만났다. 오묘한 타이밍인 것이다. 하지만 치장하는 것은 본래 나의 능력이 아니었으므로 다이어트 후에 요요현상이 오듯 나에게도 패션 요요가 왔다. 위기를 깨닫고 꾸며보려 했지만 내가 멋을 부리면 부릴수록 촌스러움이 더해졌다. 헤어도, 옷도, 걸음걸이도 점차 퇴화했다. 나는 분명 패션 어플에서 본 코디를 그대로 주문했다. 사진 속에선 압구정 길거리를 활보해야 할 것 같은 회색 바지였는데 내가 입자 스님이 되었다. 일반 피플이 된 잠깐의 시간이 꿈처럼 허물어졌다. 나는 다시 패션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오빠, 내가 바버샵 예약해놨어”


 와이프는 작전을 바꾸기 시작했다. 지속적인 잔소리를 통해 딱 두배만이라도 내가 더 잘 꾸미기를 바랐으나, 나의 센스는 0이었다. 0 곱하기 2는 0에 불과했다. 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나를 꾸미기로 한 것이다.  


아이비리그 컷 참고 (c) Barber James

“오빠, 이 사진 봐봐. 이 헤어 스타일로 잘라달라고 할 거야”

“응? 이건 너무 짧지 않아?”

“요즘 유행이야, 완전 깔끔하잖아”


사진 속에는 해병대의 상륙돌격형 머리에 앞머리만 살짝 기른 사내가 있었다. 이런 헤어스타일을 아이비리그 컷이라고 했다. 시원한 스포츠머리에 앞머리만 하늘로 승천시킨 모양새였다. 이런 머리가 어떻게 멋있을 수 있을까 싶어 사진을 들여다보니 모델이 무려 유아인이었다. 그럼 그렇지. 참고자료가 글러먹었다. 유아인이라면 삭발을 해도 깔끔하고 장발을 해도 예술적일 것이다. 와이프에겐 헤어 스타일보단 헤어를 받치고 있는 부분에 관한 고찰이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나의 머뭇거림 따위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단 1%도 바꿀 수 없었다. 와이프는 단호하게 말했다.


“늦지 말고 와”


 바버샵은 처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머리를 한 번 자르는데 4만 원이나 내야하는 미용실이라고 했다. 나는 염색도 3만 원짜리를 찾아가던 인간이다. 갑작스런 물가 상승이 당황스럽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어떻게 사람이 김치찌개만 먹나 가끔 비싼 파스타도 먹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비장하게 바버샵에 들어섰다.

 바버샵의 분위기는 미용실보단 bar에 가까웠다. 그곳엔 가위질보다 바리깡을 즐겨 쓰는 온몸에 문신을 한 미용사가 상주해있었고, 아주 세련된 RnB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분무기의 물통 부분이 술병인 것도 왠지 힙하게 느껴졌다. 한마디로 섹시한 미용실이었다. 이곳에서 머리를 자르면 나도 힙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마음이 놓였다. 미용사가 바리깡 들고 머리를 깎기 시작하자 촌스러움을 먹고 자란 긴 머리칼이 속절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 시간쯤 흐르자 미용사가 말했다. “마음에 드시죠~?”

 거울 속 내 머리는 와이프가 보여준 사진과 정확히 똑같았다. 한데 어째 내 모습은 유아인 보단 건달에 가까웠다. 중사로 막 진급한 군인 같기도 했다. 촌놈에서 건달로 변한 내 모습에 자존감마저 하락했다. 천문대에 온 아이들은 내 머리를 보자마자 말했다. “쌤, 군대에 갈 일이 생기셨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와이프는 머리가 너무 이쁘다며 연신 칭찬 세례 중이다. 연애할 때만 잠깐 흐르던 꿀까지 눈빛에 채워서는 말이다. 건달과 연예인 사이에서 나는 아직도 자아를 찾지 못했다. 유행하는 머리를 가졌지만 유행하는 얼굴갖지 못한 탓이다. 패션 피플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다만 모든 사람이 야유하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이 홀로 좋아하니 괜찮은 것도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리와 조금 가까워 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