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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현 Jul 15. 2024

별이 숨자 포즈를 취했다.

맥시멀리스트의 우주 보기

“오빠는 내 모습 보면 막 사진 찍어주고 싶지 않아? 남들은 아내를 예쁘게 찍어주고 싶어서 난리라던데, 왜 안 그래?”

 외식을 하러 나가는 차 안에서 지안은 쏙독새처럼 서운함을 쏟아냈다. 도무지 먼저 사진을 찍자고 말하지 않는 나 때문이었다. 나는 쭈구리처럼 “여기 봐.. 몇 개 찍었어”하고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 몇 장을 보여줬지만 괜히 화만 더 돋울 뿐이었다. “이게 뭐야, 내 얼굴도 안 나왔잖아.”

 세상에는 카페 안에서만 셀카를 200장씩 찍는 사람도 있지만, 10년째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같은 사람도 있다. 안타깝게도 내가 그 후자였다. 더 슬프게도 그런 사람은 사진 찍히길 원하는 사람을 서운하게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진에 대한 센스와 의지가 모두 부족하지만, 나도 아주 가끔 카메라를 든다. 천체사진을 찍을 때다.

"용운아, 나 카메라 좀 빌려줘"

"뭐 하게?"

"이번에 별 보러 스위스 가잖아, 그때 은하수 좀 찍게"

"400만 원 짜린 거 알지?"

"잃어버리진 않아 볼게..."


 카메라 가방을 메고 있는 나의 표정은 책 <정글만리>에서 태백산 정상으로 물을 지고 올르는 지게꾼과 같았다.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와이프 사진도 안 찍는 사람이, 천체사진이라고 특출 난 열정을 품을 리 없다. 이왕 들어온 베이커리 카페에서 커피만 먹기 아까워 시그니처 빵을 하나 집어 들듯, 스위스니까, 알프스 산맥 위로 은하수가 지나갈 테니까, 기록이라도 남겨놓자는 마음으로 카메라를 챙겼다. 하지만 친구의 최고급 DSLR 가방은 성능만큼이나 무거웠고, 삼각대는 우산만큼이나 거추장스러웠다. 덕분에 내 어깨는 남루한 촬영 정성만큼이나 납작해졌다.

 돌덩이 같은 카메라를 당장이라도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내 것도 아니고, 싼 물건도 아니었다. 과거의 나에게 쌍욕을 날리며 별 보는 장소까지 짐을 나르는 수밖에 없었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의 산자락, 멘리헨에 도착하자 나는 그 풍경에 눈을 비볐다. 이런 장소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고? 2222m 높이에 멘리헨은 알프스 산맥에 휘감겨 있는 작은 공간이었고, 하늘은 끝없이 맑았다. 만약 프로메테우스가 신들로부터 횃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달했다면, 그 성스러운 장소는 반드시 이곳이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은하수를 볼 수 있다니, 카메라를 가져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까지 증오하던 과거의 나를 무한히 칭찬하며 카메라를 설치했다. 산 위는 해가 짧았고, 덕분에 밤이 빨리 찾아왔다.

 문제는 밤과 함께 비구름도 같이 왔다는 거다. 후드득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잠깐 보이던 별은 금세 자취를 감췄다. 은하수 촬영은커녕 멀쩡한 제대로 된 별 하나 보지 못했다. 나는 다시 과거의 나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멍청이, 그니까 돌덩이를 왜 들고 왔냐고'.  창문 앞에 털썩 앉아 허망하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비는 멘리헨에도, 쓰임새를 잃은 카메라에도, 후회로 가득 찬 내 마음에도 내렸다. 결국 스위스 은하수를 찍는 일은 완전히 실패해 버렸다.

경건한 자세로 방 안에서 비구름을 체크하고 있는 모습
<스위스 멘리헨>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를 포함한 알프스 산맥이 360도로 감싸고 있다.

 우주의 초창기는 놀랍도록 단순했다. 빅뱅 이후, 우주는 마치 자취방 냉장고처럼 거의 비어있었고, 주로 가벼운 원소인 수소와 헬륨만이 존재했다. 이 기본적인 원소들로는 지금의 우주처럼 복잡한 구조나 생명체를 만들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다양한 원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별의 생애에서 찾을 수 있다. 별도 사람처럼 태어나고 일정 시간을 살다가 소멸하는데, 특히 무거운 별들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화려하게 폭발한다. 이를 초신성 폭발이라고 한다. 이 폭발로 별은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거운 원소들을 생성하고, 이들을 우주 공간으로 퍼트린다.

 초창기 우주를 한번 상상해 보자. 깨끗하게 정리된 부엌이지만 요리할 재료는 거의 없는 상태. 그런데 갑자기 초신성 폭발로 마치 마법처럼 다양한 식재료와 향신료들이 주방 곳곳에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다양한 원소들이 우주 공간에 퍼져 나가면서 복잡한 '요리' 즉, 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물질 구조의 형성이 가능해진 것이다.


 별이 죽으며 생성된 무거운 원소들 덕분에 지구도 생겨날 수 있었다. 암성과 땅, 생명체를 이룰 수 있는 무거운 원소들도 가득해졌다. 만약 초신성 폭발이 없었다면, 지구는 아마도 천왕성처럼 땅 한 점 없는 가스 행성이 되었을 것이고, 생명체 역시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별의 죽음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다채로운 지구의 모습과 다양한 생명 형태들이 존재할 수 있는 새로운 창조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니 별의 마지막 불꽃놀이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지구와 인류, 이 모든 것은 별의 죽음이 선사한 또 다른 결실인 셈이다.


 별의 폭발적인 종말이 인간에게 새로운 기회를 선사한 것처럼, 나의 스위스 은하수 촬영 실패도 예상치 못한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은하수 촬영에 실패하자 영화 <히말라야>의 명대사가 떠올랐다. 엄홍길 대장은 산을 정복하겠다는 후배에게 일갈했다. "산쟁이들은 정복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산이 허락해 줘서 잠시 머물다 가는 거야." 별을 보는 일도 정확히 그렇다.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최적의 장소를 찾아가도, 그날의 날씨가 허락하지 않으면 은하수의 꽁무니조차 볼 수 없다.

 기껏 친구에게 빌려서 고생 고생 하고 짊어지고 온 최고급 DSLR을 써먹지도 못했다. 하지만 칼을 빼 든 김에 무라도 썰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기왕 카메라를 챙겨 온 김에 와이프를 찍기 시작했다. 거대한 카메라로 본인을 조준하자 와이프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여기 서봐, 저기 서봐하면 군말 없이 서서 맑은 표정을 짓는다. 참 대단하다.

 사실 사진을 찍어주는 것보다는 찍히는 것이 나는 더 어렵다. 카메라를 갖다 대면 나는 곧장 돌하르방이 된다. 렌즈와 눈을 마주친 순간 메두사를 눈을 바라본 사람처럼 온몸이 굳는 것이다. 웃으라는 명령이 하달되면 내 머리를 망친 미용사가 "괜찮으세요?"라고 물을 때 짓는 표정이 나온다. ‘네... 하하핫...’ 하며 구겨진 종이 같은 미소를 제출한다. 그러니 사진기만 갖다 대면 척척 포즈를 취하는 지안이 멋질 따름이다.


"오빠, DSLR로 찍으니까 진짜 다르긴 한 것 같아. 너무 좋아."


 지안은 DSLR에 담긴 자신의 사진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카메라를 챙겨 온 일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 깨달았다. 내 저질 체력을 감안할 때, 만약 은하수를 찍느라 밤을 지샜다면 나는 지안의 사진을 찍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천체 사진을 찍는 것보다 그녀를 찍는 것이 우리 부부의 삶에 더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별이 죽어 남긴 잔해가 새로운 시작을 만들 듯, 은하수 촬영의 실패가 오히려 우리 사이의 좋은 대화의 씨앗이 되었다.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가장 반짝이는 별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카메라 앞에 있었던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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