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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현 Jun 03. 2024

달리는 북악산 패션 테러리스트

맥시멀리스트의 우주 보기

 우리 집은 북악산 자락에 있다. 언덕배기 집에 살게 되면 평지에서는 느낄 수 없던 러너(runner)로서의 게으름과 지독한 불편함을 겪게 된다. 당장이라도 뛸 수 있는데, 뛰려면 하천이 있는 평지로 차를 타고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랑천 변에 살 때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다. 그저 러닝화 끈을 질끈 매고 문을 박차고 나가면 곧장 시원한 바람과 애매한 구린내를 맞으며 뛸 수 있었다. 5cm짜리 코드를 꽂는 것이 청소의 가장 큰 걸림돌이기 때문에 다이슨이 1등 기업인 세상이다. 뛰기 위해 5m 길이의 승용자를 운전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언덕 집에서도 '곧장 러닝'을 해보겠다며 하천까지 뛰어내려 갔지만, 남은 것은 족저근막염과 병원비 영수증뿐이었다. 러너에게 평지 집은 건축물의 연식과 관계없이, 언제든 내가 원하는 순간에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갈 수 있는 발사대인 셈이다.

 난 현실을 인정했다. 집에서 뛰어내려 갈 만큼 내 몸은 단단하지 못했다. 뛰기 위해 차를 끌고 내려갈 만큼 부지런하지도 못했다. '집에 가서 신발만 갈아 신고 바로 나와야지' 하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소파는 거대한 잠자리채가 되어 나를 편안함이라는 망 속에 가뒀다. '러닝보다는 휴식이 건강에 더 좋은 게 아닐까?'따위의 합리화를 하며 소파에 널브러져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러닝화를 신고 다니기로 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전기선을 꽂는 것이 싫어 다이슨 청소기를 산 사람의 표본이다. 신발을 차에 챙겨두는 것만으로는 나의 보잘것없는 러닝 의지는 깨어나지 않는다. 즉시 뛸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마음에 찼을 때 바로 뛸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러닝화를 신고 다녀야 했다.

 출근을 준비하며 검은색 카라티와 슬랙스, 그리고 러닝화를 신었다. 정장바지에 러닝화를 신자니 뭔가 패션 테러리스트가 된 것 같았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패션감각은 원래 없었다. 회색 운동복에 갈색 구두를 신었다가 치과 의사 선생님에게도 비웃음을 들었던 나다. 그러니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은 본래 없었던 패션감각이 아니라, 미약하나마 존재했던 러닝의 빈도인 것이다.


파크스 천문대/ 1969년 달 착륙 영상을 중계하는 등 역사적인 우주 탐사 임무를 수행한 호주의 대표적인 전파 천문대다.



외계인도 우리처럼 9 to 5 근무를 하는 거야?


 파크스 전파 망원경의 신호를 들여다본 천문학자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파 신호를 2007년부터 포착하기 시작했다. 특히 2015년에만 수백 개의 전파 신호가 포착되었다. 게다가 별들이 자연적으로 내는 신호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천문학자들은 흥분했다. 드디어 우리가 외계 문명의 신호를 받은 것인가?

 그 신호들은 두 가지 주파수 대역에서 발생했다. 대부분은 2.4 GHz 대역에서 발생했고, 간헐적으로 1.4 GHz 대역에서도 신호가 포착되었다. 특히 1.4 GHz 대역은 천문학자들에게도 생소한 전파였다. 과학자들은 왜 두 주파수에서 신호가 나타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신호는 거의 주간 근무 시간 동안에 발생했다. "외계인도 우리처럼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5시에 퇴근하는 건가?" 천문학자들은 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혼란스러워했다.

 천문학자들은 신호의 정체를 밝히기 시작했다. 먼저, 신호가 잡히는 시간과 주파수의 패턴을 세심하게 분석했다. 매 신호 발생 시각과 주파수를 기록하고, 이를 통해 규칙성을 찾으려 했다. 새로운 신호가 발생할 때마다 다른 관측 장비를 사용해 추가로 확인하고, 데이터 로그를 정밀 분석했다. 전파를 발생시킬 수 있는 천문대 안의 모든 전자 기기를 점검하고, 가능성 있는 모든 원인을 배제해 나갔다. 천문학자들은 주간과 야간을 가리지 않고 관측소에 머물며 신호가 포착될 때마다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매일매일 쌓여가는 데이터를 통해 신호의 원인을 좁혀갔다.


 결국 2015년, 그들은 진실을 밝혀냈다. 그동안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신호의 기원은 다름 아닌 천문대 주방의 전자레인지였다. 전자레인지는 음식을 데울 때 강한 전파를 발생시키는데, 그 주파수는 2.4 GHz 대역에 해당한다. 이 전파는 전자레인지 내부에 있는 마그네트론이라는 장치가 만들어낸다. 마그네트론은 전자를 빠르게 움직여 마이크로파를 발생시키고, 이 마이크로파가 음식 속 물 분자와 충돌하면서 열을 발생시켜 음식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런데 전자레인지 문을 갑자기 열 때는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전자레인지를 30초 예약해 놓고도 남은 3초를 못 참고 문을 확 열어버릴 때 말이다. 이럴 때 마그네트론이 정상적으로 꺼지지 않고 갑자기 멈추면서 1.4 GHz 대역에서 일시적으로 전파가 발생한다. 이러한 전파가 천문대에서 미확인 신호로 포착된 것이다. 몇 년 동안 풀리지 않던 우주의 미스터리가 사실은 점심시간에 데워 먹은 피자 때문이라니! 외계 문명의 신호라며 흥분했던 과학자들은 허무함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 이후 전파 천문대에서는 전자레인지는 물론, 모든 전자 기기의 사용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천문학자들은 연구 중에는 휴대폰도 끄고, Wi-Fi 신호도 차단했으며, 심지어 커피포트도 사용 금지 리스트에 올렸다. 주방에서는 전자레인지 대신 가스레인지가 설치되었고, 관측소 주변에는 전자파 차단 장치가 추가로 설치되었다. 외계 문명의 신호를 잡기 위해선 방해가 되는 인간의 전파를 먼저 통제해야 했다. 마치 내가 러닝을 하기 위해 변명 거리를 없앤 것 처럼.



 러닝화를 신고 다니면 하루는 이렇게 달라진다. 퇴근하는 길에 러닝 트랙이 있는 성북천 근처에 차를 댄다. 신발은 이미 섹시/날렵한 블랙 러닝화. 좁은 차 안에서 낑낑대며 반바지로 갈아입은 뒤 차에서 내린다. 밤하늘엔 예쁜 반달이 기울게 떠있다. 발목을 두어 번 성의 없이 돌려주고는 서서히 달리기 시작한다. 처음 1KM는 행복하고 그 뒤로는 내내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오늘은 뛰었으니까.

 아 물론 위는 상상이다. 러닝화를 신은 후로 하루가 정말 달라졌을까? 그럴 리가. 나는 그저 슬랙스에 러닝화를 신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러닝의 빈도는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러닝화의 구매 주기뿐이다. 뛸때만 러닝화를 신었을 때는 2년도 신었는데, 괜히 매일 신고 다녀서 애먼 러닝화만 닳았다. 결국 6개월 만에 새 러닝화를 또 샀다. 또 이렇게 892649번째의 창조 소비가 이뤄졌다.

 매일 뛰지 않고 집에 들어서며 러닝화를 벗을 때마다 '왜 러닝화를 신고 나갔지'하는 부끄러움이 들었다. 뛰는 건 장비 보단 의지의 문제구나 싶다. 벽에 걸려있는 다이슨이 무색해지는 밤이다. 하긴, 저놈을 샀다고 청소를 더 자주 한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러닝화를 신는 매 순간 나는 약간의 희망을 품는다. 집을 나서며 오늘 밤 시원하게 달릴 생각을 한다. 마치 천문학자들이 전자레인지 신호를 포착하고도 '외계인의 신호를 잡은 게 아닐까?' 하고 설렌 것처럼. 우리의 삶은 작은 희망과 착각으로 채워진다. 오늘도 슬랙스에 러닝화를 신었지만, 내일은 정말 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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