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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혁 Sep 29. 2022

출근자에서 여행자로

D+69 (2022년 9월 29일)

여기는 제주도 서귀포시 색달동의 어느 에어비앤비 숙소.

막 자정을 넘겨 2022년 9월 29일이 되었다.

6박 7일로 예약한 이 숙소에서의 마지막 날이 시작됐다.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는 적당한 소음이 필요했던 차에

창밖에서 귀뚜라미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들의 밤샘 토론이 조곤조곤 이어진다.


이 글의 대문 사진은 어제 오전에 숙소 주방 쪽 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제주도 바다와 하늘을 찍은 것이다.  

이 숙소는 다소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바다를 바라보면 수평선이 눈높이에 오고
바다와 하늘의 색깔이 비슷해 둘의 경계를 확정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완전히 우세해지면 밤바다에 하나둘 자리 잡은 어선들의 조명이  

가로로 나란히 이어져 줄 형태의 장식등처럼 깜빡인다.

바다와 하늘의 구분선이 모호하므로 마치 하늘에 조명이 걸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다닌 회사에, 마지막으로 출근한 날로부터 69일이 지났다.

D+69.

대책 없이 퇴사하겠다는 나를 믿고 지지해준 와이프 덕분에 가능했던 시간이었다.    


2022년 7월 22일(금) 오후 6시를 조금 넘겨 퇴근한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퇴근해 있는 셈이다.

세어 보니 2022년 7월 23일부터 지금까지 24일 정도를 제외하고 모두 여행지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특히 7월 23일부터 9월 1일까지는 한국 땅에 머무른 날이 고작 4일뿐이었다.


퇴사 후 한동안 반드시 한국에서 떨어져 지내고 싶었다기보다는 여행 일정을 짜다 보니 그냥 그렇게 됐다.

만 9년 7개월 정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시는 직장인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 떠난 여행이었다.

베트남의 호찌민과 무이네,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의 발리,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

그리고 몽골의 홉스골과 테를지.  

태어나 처음으로 보름 넘게 지속한 해외여행에서 많은 것을 보고, 먹고, 찍었다.


장기 여행의 여독을 풀고 추석 연휴 동안 양가 부모님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고자

9월 초중순엔 여행을 중단했다.


그러고 나서 9월 21일부터 10월 7일까지는 목포, 제주, 부산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출근자에서 탈피해 여행자로 사는 것은 좋지만

여행을 이어가다 보니 퇴사 후의 생각을 차분히 정리할 시간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여행자로서의 해방감과 즐거움은 잠시일 뿐이고 앞으로 월급 없이 생활하는 일상 속에서

좌충우돌이 얼마나 많을까. 고민이 얼마나 넘쳐날까.
앞으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영화감독의 꿈을 좇는 동안 떠오를 생각과 느낄 감정을 글로 쓰거나 영상으로 제작해서 만에 하나 나를 받아주겠다는 회사가 나타날 경우에 혹하지 않도록 보고 또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겪게 될지 1도 짐작할 수가 없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 저 사진 속 풍경처럼,

반복적 출근이 소거된 나날도 흐릿하기 십상일 것이다.   


출근하지 않는 미지의 세계는 두렵다.

하지만 꿈을 향한 첫걸음은 무척 설렌다.


벌레들의 밤샘 토론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불규칙적인 듯 하지만 나름의 리듬감이 있는 그들의 소리 덕분에

나의 '다 그만두고 영화감독이 되려고' 연재를 이렇게 시작한다.  



<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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