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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엔 있고, 한국엔 있었던 장르

Movie Appetizer#32 선생님의 일기

태국의 수상 가옥
동남아 국가의 멜로 영화들
실종된 한국 멜로 영화들

일기장을 매개로 다른 시간대의 남녀가 소통한다는 설정을 들었을 때, 아기자기하면서 감성적인 영화일 것 같다는 기대를 했다. 그런데 이 영화가 태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들었을 때, 어떤 선입견을 품고 말았다. 개인적인 기억 속에 태국이라는 곳은 북적거리고 번잡하다는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었다. 멜로 보다는 무에 타이 등이 등장하는 <옹박>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았고,(자연스레 이는 액션 영화를 연상하게 했다) 서정성보다는 활기찬 분위기를 환기하는 게 태국이었다. 그래서 이번 영화는 신선했다. <선생님의 일기>는 태국이란 공간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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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수상가옥

황금 사원, 석회질 물, 코끼리, 열대성 기후, 무에 타이, 싱하 맥주(정말 맛있다!)…. 태국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들이다. <선생님의 일기>는 외부인이 상상하는 태국의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대신, 한적한 자연 속에 있는 수상가옥을 주요 무대로 삼는다. 물론, 태국 여행 중에 수상가옥을 본 적이 있다. 도심의 근처, 관광지와 인접해 있던 수상가옥은 신기했지만,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영화를 통해서 다시 접한 수상가옥은 고요하면서 서정적이고 낭만까지 모두 갖춘 공간이었다. 관광객이 멀리서 바라본 태국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선생님의 일기>의 카메라는 이를 아름다운 영상미로 담아내기까지 한다.


물 위에 떠 있는 학교엔 극히 적은 숫자의 아이들이 있다. 이곳에 발령을 받은 앤(레일리 분야삭)과 송(비 스크릿 위셋케우)은 통신 기기를 사용할 수 없고, 전기도 도시처럼 쓸 수 없다. 강원도로 전근 갔던 <선생 김봉두>의 김봉두처럼 외부와는 격리된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설정 덕에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속에서 아날로그적 감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일기를 통해 시간을 넘어 소통한다는 설정은 거짓말 같지만, 이 수상 학교의 아날로그 감성 속에선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 학교의 아이들은 순박하며, 도시의 아이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두 주인공 앤과 송 역시 아이들처럼 해맑고 순수하다. 아름다운 풍광에 인물들이 자연스레 겹쳐지고, 영화 전체가 맑고 깨끗한 느낌을 전달한다. <선생님의 일기>는 도시에서는 실종된 소박한 삶과 교육관, 그리고 사람 간의 소통을 따뜻한 시선으로 품고 있다. 그렇게 수상가옥이라는 공간의 서정성이 인물을 거쳐 영화 전체에 전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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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멜로 영화의 계보

자극이 덜한 이야기, 순수한 인물, 아날로그적인 분위기, 첫사랑 같은 설렘, 그리고 서정적인 영상미. 이는 <선생님의 일기>의 특징이면서, 근래 인기 있었던 아시아권 멜로 영화의 코드이기도 하다. <나의 소녀시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그리고 더 이전에 있었던 <말할 수 없는 비밀> 등의 영화가 이런 코드를 공유했고,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순수한 멜로 영화가 인기를 얻고 있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산업적 측면에서 본다면, 멜로물은 적은 예산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할리우드의 마블 등이 자랑하는 대규모 블록버스터를 아직 제작하기 힘든 대만, 태국 등의 아시아 국가에 멜로는 그들이 가진 자원만으로도 탄탄한 작품을 만들어 보일 수 있는 좋은 장르다. 한편, 관객에게는 모바일 시대 이전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멜로는 매력적이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 소통하고, 사람 간의 직접적인 교류가 줄어든 이 시대는 과거의 인간관계를 그립게 할 때가 있다. (국내에서 <응답하라> 시리즈가 일으킨 돌풍을 이와 유사한 심리적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아시아권 멜로 영화의 한계는 뚜렷하게 보인다. 과거의 향수와 서정적인 분위기 외엔 진부한 클리셰, 전개 및 작위적 설정이 많다는 것이다. 멜로 영화가 의도한 분위기가 희미해질 때, 동시에 이야기는 힘을 잃고, 전개는 진부해 진다. <말할 수 없는 비밀> 이후의 멜로 영화는 아름다웠으나 새롭지는 못했다. 그렇다해도 당분간 이런 장르의 영화가 더 만들어 질 것이고,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국내외로 상처받은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눈앞의 현실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이들은 영화에서라도 감정적 위로를 받으려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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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멜로 영화

아시아권에서 보이는 멜로물의 흥행이 한국 영화사에서도 이미 있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태국과 대만보다 영화산업의 덩치가 커진 한국은 멜로물이 전성기였던 시대를 통과했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가 국내에서 흥행한 이후, 한국에서는 90년대 후반부터 멜로 영화가 전성기를 달렸다. <8월의 크리스마스>, <미술관 옆 동물원>, <시월애>, <동감>, <클래식>, <연애소설>…. 그러다 멜로 영화의 흥행은 잠시 주춤거렸고, 2012년 <건축학 개론>이 등장하고서야 극장가는 잊었던 멜로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멜로는 비주류 장르로 분류된다. 한때, 지배적이었던 장르가 이렇게 쉽게 찬밥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관객의 취향이 급격히 변한 것일까. 큰 원인 중 하나는 ‘대박’을 위한 천만 영화를 위한 기획이 제작사에게 중요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때, 한국 영화는 흥행을 위해 ‘신파’, ‘웃음’이라는 코드가 꼭 있어야만 하는 시기도 있었다. 그 과정을 겪으며 장르적 균형이 상당히 깨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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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다양화, 잃어버린 감성의 복구 등 멜로라는 장르가 국내 영화 산업에 기여할 수 있는 지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장르의 회복이 절실한 이유는 실종된 여자 주인공들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 무작정 멜로라는 장르를 생각할 때, 연상되는 배우는 (여전히) 손예진, 김하늘, 전지현 등이다. 20대 여배우가 없다는 지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데, 그 배우들이 연기할 장이 부족하다는 게 사실 더 큰 문제다. 현재 영화계엔 김고은, 심은경, 박소담, 김태리 등 관객과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좋은 배우들이 많다. 그들의 멜로 연기를 보고 싶고, 새로운 세대의 멜로 영화를 보고 싶어진다. 태국엔 있고, 한국엔 있었던 그 감성이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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