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Appetizer#33 스플릿
볼링이라는 스포츠를 보여준다는 것
<레인 맨>의 기시감
좋은 연기자 vs 연기가 아까운 역할
‘스트라이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연상되는 스포츠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팬을 가진 야구보다 볼링을 먼저 생각했다면, 볼링을 꽤 좋아하는 분일 것 같다. 그리고 그 대답을 한 분들이라면, <스플릿>이라는 영화에 남다른 기대를 하고 있지 않을까. 많은 스포츠가 영화의 소재가 되었지만, 볼링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지 않았으니 반가울 수밖에 없을 거다. (<킹핀>이라는 볼링 영화가 있는데, 물론 이 기회에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영화다)
이 소재가 잘 다뤄지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다. ‘볼링’이 프로 스포츠로서의 인기가 다른 종목에 비해 많지 않다는 것. 그리고 국제 대회 등에서 주목받은 독특한 스토리가 없다는 것. 상업영화 제작 시 관객의 수요를 고려한다면, 제작사 입장에서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다. <슈퍼스타 감사용>, <퍼펙트게임>, <글러브>, <미스터 고> 등의 야구 영화, 그리고 <국가대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의 국제 대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볼링은 영화화하기에 이미지가 조금은 심심할 수도 있다. 좁은 공간에서 정적으로 진행되는 볼링은 멘탈의 흔들림이 경기의 승패를 좌우한다.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세게, 등의 동적인 행동이 긴장을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카메라가 담을 이미지가 한정되고, 컷이 단조로울 위험이 있다. 스포츠에서는 ‘예측 불가능한 드라마’를 기대하지만, 영화에서는 ‘예측할 수 있으면서도, 극적인 볼거리’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각각의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장면이 다르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볼링은 영화로 쉽게 만들 수 있는 종목이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스플릿>은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볼링이 가져올 영화적 한계 앞에, <스플릿>은 ‘자폐아 소년’이라는 인물과 ‘도박’이라는 설정을 가져온다. ‘자폐아 소년’은 약자가 만들어내는 승리라는 감동 코드, 그리고 아웃사이더가 사회와 소통하는 따뜻한 모습을 기대하게 한다. 그리고 ‘도박’은 <타짜> 등에서 느꼈던 장르적 재미를 기대하게 한다. 이 인물과 설정은 <스플릿>의 감성과 긴장감을 채워 넣으며 제 역할을 다한다. 그런데 이들이 역할을 다 할수록 영화는 흥미가 떨어지는 기이함과 마주하게 된다.
신선한 볼링을 가져와 자신이 초래할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썼지만, 이 영화는 어딘가 낯설지가 않다. 돈이 필요한 주인공 – 도박에 천재적 능력을 지닌 자폐아는 더스틴 호프만과 톰 크루즈 주연의 <레인 맨>의 구도와 꽤 흡사했다. 꼭 <레인 맨>이 아니더라도 <스플릿>의 전개는 새롭지 못하다.
볼링핀의 움직임이 더는 새로운 걸 보여줄 수 없을 때부터, 영화는 더 보여줄 것을 찾지 못하고 진부한 전개 속으로 밀려난다. 이 영화에 기대했던 스포츠와 도박의 장르적 즐거움은 철종(유지태), 영훈(이다윗)이 보여주는 익숙한 드라마 속에 힘을 잃는다. <스플릿>이 착한 영화를 지향했거나, 혹은 안전한 영화를 원했을 수도 있다. 그 덕에 볼링이라는 스포츠와 도박이 표현할 수 있는 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볼링과 도박이 영화에서 밀려날수록 <스플릿>에서 빛나는 순간을 만드는 건 두 배우 유지태와 이다윗이다. 장르적 즐거움을 기대한 관객에겐 아쉬울 수 있지만, 영화가 쌓아가는 감정은 좋은 연기 속에 결국 꽃을 피웠다. 유지태의 하류 인생은 이다윗의 평범하지 못한 인생과 만나 연민과 감동, 웃음을 끌어낸다. 저 스스로 버린 인생(철종)과 어쩔 수 없이 버려진 인생(영훈). 두 버려진 남자는 서로에게 기대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 과정에서 오는 소소한 재미, 진한 감동이 있다. <명왕성>에서 빛났던 이다윗은 최근 드라마에서 보여줄 기회가 없던 연기력을 원 없이 뽐낸다. 그는 이 영화의 가장 큰 수혜자다.
반면, 이정현의 역할(희진)은 그녀가 맡기에 너무도 아쉬웠다. 작년, 그녀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로 여우주연상을 다수 받았다. 이 다재다능한 배우가 <스플릿>에서 어떤 것도 끌어낼 수 없는 도구적 역할을 맡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녀의 연기가 인정받고, 꽃피운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시기에 맡은 역할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배역의 크고 작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영화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인물인가를 생각했을 때, 한계가 보였다는 것이다. <스플릿>의 익숙한 서사 속에 그녀의 역할조차 단조로워졌다. 볼링이란 새로운 도전으로 따뜻한 순간을 기어이 만들어 내는 영화였지만, ‘볼링’도, ‘도박’도, ‘이정현’도 온전히 살리지 못한 아쉬운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