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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기#015 위플래쉬

어쩌면 <그래비티>와 가장 닮은 영화

풍선이 터지듯 영화가 끝납니다. 그리고 강렬한 재즈의 선율은 영화관을 나선 관객과 꽤 긴 시간 동행하죠. <위플래쉬>는 근래 영화관에서 봤던 영화 중 가장 강렬히, 그리고 깔끔하게 끝나는 영화였습니다. '깔끔하다'는 표현은 강렬한 한방으로 영화와 현실의 경계에 선을 긋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한방은 진한 여운까지 주죠. 그 여운을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 것이지만, 이 여운을 가진 채로 <위플래쉬>를 영화를 읽는 시도는 삼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음악이 주는 황홀함이 영화를 제대로 바라보기 힘들만큼 압도하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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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압도당한 느낌 자체만으로도 홀렸던 영화이지만, 관람 이후에 관객들이 플레쳐 교수(J.K 시몬스)에 대해 주고받는 의견들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이 영화가 얼마나 좋은 영화로 기억될지는 모르겠지만, 음악으로 감정을 마비시키는 것에 성공한 것과 더불어, 영화를 본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말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라 생각합니다. 덕분에 읽어보고 싶어진 영화. 이 글은 <위플래쉬>가 보여준 마지막 한 방(연주씬)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도가 될 것입니다.


음악적 성취를 향한 예술가의 고난

(1) 두 개의 문

영화의 시작과 함께 청년이 방 안에서 드럼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카메라는 그를 향해 다가가고 방 안으로 들어가죠. <위플래쉬>에 대한 다양한 글들은 이 초반부 카메라 워킹에서 ‘시점’에 주목하고 있는데(카메라는 플렛쳐 교수의 시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더 초점을 맞춰보려는 것은 플렛쳐가 문을 넘어 앤드류(마일즈 테일러)의 공간으로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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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대칭을 이루는 장면이 영화 후반부에 등장합니다. 미친 듯 연주를 하는 앤드류를 문 뒤편에서 응시하는 그의 아버지(폴 레이저)는 차마 문을 넘지 못합니다. 이 문은 아버지가 서 있는 곳과 아들이 속한 세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셈이죠. 두 사람이 발 딛고 서 있는 공간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울지 모르나, 그들의 간격은 굉장히 멀어 보였습니다. 앤드류는 친아버지의 공간에서 빠져나왔고, 플렛처를 새로운 공간에서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듯하죠. 어쩌면 이 영화는 생물학적 아버지와 사회학적 아버지의 대결이고, 생물학적 아버지의 패배라는 비극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2) 사회학적 아버지의 목표

플렛처라는 아버지의 목표는 아들(제자)이 찰리 파커와 같은 전설적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연습을 시키고, 모욕을 주며 끝없이 채찍질하죠. (Whiplash는 앤드류가 연주하는 곡의 이름이자 채찍질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인데 여러 가지로 참 적절해 보이는 제목입니다) 플렛처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쉽게 할 수 없는 행동을 예술가에게 필요한 순간이자 고난이라 말합니다.


이 행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관객에게 남겨진 몫입니다. 플렛처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제자를 가르쳤지만, 결과적으로 앤드류는 음악적 성장을 이뤄냈죠. 비인간적인 방법과 성공적인 결과. 이 두 가지 사실의 간격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플렛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앤드류는 혹독한 길을 견뎌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예술적 대가의 길이 쉽지 않으며, 그 길에는 어떤 숭고함이 있다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보여주기도 했죠. (몸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꺼내겠습니다.)


(3) 성취에 대한 오독

앤드류를 통해 관객은 예술이라는 길의 험난함과 이를 이겨내는 인간의 의지를 봤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끌어낸 플렛처에 대해 대중의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영화에 대한 모든 감상과 의견들이 가능하고, 저마다의 가치가 있기에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견제하고 싶은 수용자와 감상이 있었습니다.


플렛처를 한 청년의 성장을 이뤄낸 진정한 스승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특정 정치인들이 플렛처에 감정을 이입하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현재 국가의 어려운 상황이 국가의 발전을 위한 과정이며, 이 과정을 이겨내야만 국가적 성취를 이뤄낼 수 있음을 주장한다면, 이 영화에 대한 가장 무시무시한 오독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정치는 모두 옳은 것이고 추구되어야 하는 과정이라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할 때, 그것을 진정으로 믿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을 향한 정당한 비판에도 귀를 닫아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른이 된 소년

(1) 취향이 아닌 선언

<위플래쉬>에서 앤드류가 타인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은 드뭅니다. 영화는 앤드류의 다양한 행위 중 음악과 관련된 것만을 집중해 보여주죠. 그래서 음악과 무관한 장면, 아버지와 영화를 보며 팝콘을 소재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유독 눈에 들어옵니다. 팝콘과 초콜릿을 섞고 난 뒤 앤드류는 팝콘만 먹겠다고 하죠. 처음에 이 장면은 앤드류의 취향을 표현하는 장면으로 보였습니다. 동시에 자신이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듯 가고 싶은 길을 가겠다는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했죠.


그런데 앤드류는 왜 단맛의 초콜릿이 아닌 짠맛의 팝콘만을 골라 먹으려고 했을까요. 그는 달콤한 인생이 아닌 짠맛이 나는 인생을 원하는 괴짜였을까요. 영화를 통해 앤드류는 쉬운 길이 아닌, ‘버드’라는 이상향을 향해 고단한 길만을 선택하는 독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팝콘과 초콜릿이 보여준 그 대화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죠. 인생에서 단맛만을 쫓지 않겠다는 예술가의 독한 선언이자 다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2) 어른이 된 앤드류 그리고 포르노

<위플래쉬>는 소년이 어른이 되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른'이라는 것을 인간이 성숙해지고, 인생의 쓴맛을 알아간다는 성장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조금 더 한국적으로 읽어보려고 합니다. ‘어른’이라는 한글 단어의 유래는 흥미롭습니다. 이 단어는 옛말 ‘얼다’에서 유래한 말로, ‘얼우다’의 어간 얼우-에 사람을 뜻하는 ‘이’가 붙어 ‘얼운이’가 되었고, 이것이 ‘어른’이 되었다고 하죠. 그리고 ‘얼다’는 ‘남녀가 관계를 맺다’라는 뜻의 말이었습니다. 결국, 어른은 잠자리를 가진 사람을 뜻하는 거죠.


그렇다면 이 ‘어른’을 어떻게 <위플래쉬>와 엮을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음악이라는 겉옷을 걸친 포르노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앤드류가 드럼을 칠 때 흐르는 땀방울은 어딘가 외설적이죠. 그 땀이 드럼을 적시고, 드럼은 격렬히 운동하며 격한 음성을 토해냅니다. 그리고 그의 표정 역시 절정에 이른 남자의 표정을 연상시키죠. 에로틱한 장면이 연상되도록 앤드류의 드럼 연주 장면은 연출되었습니다.

이 관점을 더 확장하려면 여자친구였던 ‘니콜(멜리사 베노이스트)’을 봐야 합니다. 앤드류는 그녀와 더 깊은 관계가 될 수 있었지만 찰리 파커처럼 되기 위해서 그녀를 포기하죠. 이 장면은 대가의 길을 가기 위한 한 남자의 고독한 선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앤드류의 연주를 포르노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설정을 가져온다면 다른 시선에서 이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앤드류는 두 여자(음악과 니콜) 사이에서 한 여자를 선택하는 남자이고 <위플래쉬>는 삼각관계를 보여주는 로맨스가 될 수 있는 거죠. 그는 니콜과 관계를 통해서 어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더 의미가 있는(물론 더 혹독한) 음악과 관계를 맺고 어른이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번외로 앞의 가정, 음악-앤드류-니콜이라는 구도를 조금 변형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 구도에서 음악이라는 자리에 플렛처 교수를 대입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플렛처-앤드류-니콜의 삼각관계로 <위플래쉬>를 봐도 다양한 해독이 가능할 것입니다. 가학적인 남성과 피를 흘리면서까지 인정받으려는 소년. 그리고 결국 살며시 미소를 보내는 플렛처의 모습에서 동성애 코드를 대입시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죠.


마치며... 어쩌면 <그래비티>와 가장 닮은 영화

2013년 <그래비티>를 영화관에서 관람한 후에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비티>는 현시대 영화가 TV 동시상영이 가능하고, 다운 받아서 집에서 볼 수 있는 시대에 여전히 영화관의 존재 의미를 말해주는 영화였습니다. (테크놀로지의 영향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본다는 게 아니라 우주를 체험한다는 느낌을 줬던 영화였고, 영화관에서 몰입했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있던 영화였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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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번에 <위플래쉬>를 보면서 영화관과 음악의 조합도 환상적일 수 있음을 봤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꽤 강렬한 것이기에 다른 음악영화를 기다리게 하죠. <레미제라블> 역시 음악이 강조된 영화였지만, 그때와는 또 느낌이 달라습니다. <위플래쉬>는 음악을 체험할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영화관이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는 이유를 보여줬다 생각합니다.


<위플래쉬>는 마지막 앤드류의 연주 한방이 줬던 마취가 풀리면 점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쓴 뒤, 훗날 다시 이 영화를 본다면 플렛처 교수처럼 무자비하게 이 영화에 비판의 돌을 던질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직은 이 영화를 음악이 준 강렬함으로, 그리고 예술적 성취를 위해 고난을 견뎌낸 한 남자에 대한 경외심, 숭고함으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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