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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기#016 졸업

무빙워크 위의 삶

차가 멈췄고 남자가 달립니다. 쫓기던 남자가 미친 듯 달려 도달한 곳은 교회. 하지만 그가 원한 것은 구원이 아니었죠. 오히려 그는 성스러운 결혼식에 훼방을 놓고, 연모했던 여인과 함께 도망치면서 그만의 로맨스는 완성합니다. 이는 1967년 작 <졸업>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후에 많은 유사 장면을 낳은 부분입니다. 그런데 도전적이면서 절절한 로맨스가 완성되는 이 장면보다 더 마음이 가는 장면이 습니다. 감독이 가장 긴 테이크로 촬영했으며, 영화의 주제와 메시지가 직설적으로 표현된 영화의 도입부입니다.


크레딧과 함께 오랜 시간 지속되는 첫 장면에서 벤자민(더스틴 호프만)은 무빙워크에 올라 출구를 향해서 갑니다. 그는 가만히 서 있지만, 어딘가로 향하고 있죠. 무빙워크 위에선 그가 가야 하는 방향과 종착지는 미리 정해져 있습니다. 또한, 이런 그의 모습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과 닮은 구석도 있죠.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단계적으로 조립되며 상품이 되듯, 벤자민도 부모(혹은 그 시대가) 원하는 삶대로 흘러와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는 졸업이라는 단계를 마치고(무빙워크에서 내리고) 사회로 나가야 하는 하나의 조립품이죠. 부모가 만든 길 위에서 앞으로만 내 달렸던 삶은, 그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을까요. 혹은 그는 어떤 제품이 되어있었을까요.


새로운 무빙워크의 작동, 도피처로서의 물

벤자민이 집으로 돌아오면 그를 위한 파티가 한창입니다. 그런데 벤자민은 자신을 위한 그 파티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죠. 오히려 지겹고 따분해 하며 파티에서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사실, 이 파티는 그를 위한 파티가 아닙니다. 그가 가져온 졸업장을 비롯한 기타 경력과 학력 따위를 위한 것이죠. 더불어 졸업에 대한 상으로 주어진 자동차는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물건이라기보다 사회에서의 지위를 나타낼 수 있는 이름표입니다. 자동차를 보며 ‘여자들이 많이 따르겠는데? 여자들은 저런 차를 보면 좋아 죽지’라는 대사를 통해 기성세대의 태도는 드러납니다. 어른들은 벤자민을 빛내줄 학력과 지위라는 옷을 입히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왔고, 앞으로도 쓸 것이죠.

졸업 후의 미래를 묻는 말에 벤자민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무빙워크에서 내린 그는 길 잃은 미아일 뿐이죠. 하지만 이 미아의 방황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친절하게도 어른들은 이미 벤자민의 새로운 길을 그리고 있었죠. 어떤 일이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누구와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밑그림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부모가 그린 이 길을 그대로 걸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생일파티 때, 우스꽝스러운 차림으로 물에 뛰어드는 모습은 그의 앞길을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 동시에 이 장면에서는 인생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한 청년의 비참함마저 느낄 수 있죠. 하지만 다행인지 이 비참함 속에서 벤자민은 안식을 발견합니다. 떠밀려서 들어 온 물속에서 외부로부터의 시선과 소리를 차단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던 거죠. 이후 많은 시간을 수영장에서 보내는 그의 모습에서 이 공간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벤자민은 물에서 안식을 얻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도피처일 것만 같았던 그녀

로빈슨 부인(캐서린 로스)은 벤자민의 무료한 일상에 자극을 주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자극이라는 것이 좀 독특합니다. 자신의 어머니와 동년배인 로빈슨 부인은 벤자민에게 값진 조언을 해줄 것만 같았던 그녀는 ‘어른의 세계’가 무엇인지 직접 가르쳐주죠. 그녀 덕분에 벤자민은 졸업과 동시에 '성(sex)'이라는 것에 눈을 뜰 수 있었고, 쾌락을 탐닉하게 됩니다. 물론, 이 탐닉도 어딘가 좀 이상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수동적이고 우왕좌왕하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죠. 로빈슨 부인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는 두려움마저 느껴질 정도입니다.


아무튼, 그는 졸업 후 처음으로 즐거운 일을 찾는 것엔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무료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혹은 생의 감각을 되찾아 주는 성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던 <졸업>은 엘레인이 등장하면서 다른 국면을 맞습니다. 벤자민이 선택했던 쾌락이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는 것은 정말 한 순간이었죠.

엘레인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로빈슨 부인에 대해 더 생각해보려 합니다. 로빈슨 부인은 벤자민이 졸업하기 전, 그러니까 사회에 발을 내딛기 전까지는 그를 보살펴 줬던 부모님 같은 존재였죠. 그런데 그가 졸업하고 돌아온 날, 그녀의 유혹은 시작되었고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가르쳐 줍니다. 여기서 그녀를 벤자민의 감춰진 성의 본능을 해방한, 쾌락에 대한 탈출구를 마련해준 인물로 곱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그녀를 곱게 바라보기엔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불륜 사실이 발각된 뒤에 사실을 왜곡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그리고 벤자민을 가해자로 몰아버리죠. 그런데도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없던 청년은 진실을 말할 힘이 없었고, 그가 기댔던 여인에게 버림받고 아파합니다.


결국, 벤자민은 어른으로서의 첫걸음을 기성세대(로빈슨 부인)의 장난감, 혹은 쾌락의 도구로 시작한 셈입니다. 그는 기성세대가 유인한 쾌락의 함정에 빠졌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의지는 무시당합니다. 그리고 로빈슨 부인의 잘못을 대신 뒤집어써 낙인이 찍히고, 그가 원했던 사랑은 구할 수 없었죠. 그의 시작은 억압받았고 이 첫걸음은 이후의 나머지 걸음, 즉 앞으로의 삶도 기성세대에 종속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암시로 보였습니다.


삶의 목표가 되어준 그녀

엘레인은 벤자민이 졸업 후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사랑한 여인이며, 하나의 목표가 되어준 존재입니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앞서 로빈슨 부인을 대하던 태도와는 전혀 달랐죠. 로빈슨 부인 앞에서 벤자민은 갈팡질팡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였습니다. 단지 쾌락, 욕정을 쏟아낼 대상으로서 그녀를 찾았을 뿐입니다. (물론 그녀도 그랬죠) 하지만 엘레인 앞에서는 사랑 때문에 설레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의 변화는 그녀에게 버림받은 후에도 끈질긴 구애를 하는 장면들에서 가장 잘 표현되죠. 누구도 시키지 않았음에도 집을 떠나 그녀를 찾아가고, 몇 번의 거절에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결혼을 위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감정은 폭발하기에 이릅니다.


앞서 언급한 절박한 질주와 결혼을 막기 위해 결혼식장을 뒤집어 놓는 그의 대담함은 졸업 직후 방황하던 그에게서는 찾을 수 없던 것입니다. 엘레인은 그런 존재입니다. 벤자민 스스로 감정과 분노를 표현할 수 있게 해준 존재이면서, 동시에 부모님이 원하던 삶과 사회가 정해준 틀을 부숴버릴 수 있게 해준 동력이죠. 부모가 원했던 결혼이라는 속박을 버리고서 ‘아직 안 늦었어요’라며 결혼식장을 뛰쳐나오는 그녀와 벤자민에게서는 속박받는 젊은 세대의 저항과 자유를 원하는 모습이 함께 오버랩 되어 보였습니다.


해피엔딩일 리 없는....

벤자민은 원치 않던 환경에 갇히려던 엘레인을 구했고 연인을 되찾았습니다. 갇혀있던 그가 오히려 교회의 문을 닫아 억압하던 모든 것(기성세대, 결혼, 어쩌면 종교까지)을 통쾌하게 가두었고, 버스를 타고 연인과 떠나며 영화는 끝이 나죠. 그런데 로맨스의 완성으로 끝난 이 영화는 해피엔딩일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 아니며, 다시 돌아왔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로 돌아왔다는 것일까요. 영화의 시작, 무빙워크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 영화는 결말은 오프닝의 그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벤자민과 엘레인이 도피의 수단으로 버스를 선택했습니다. 여기서 버스라는 이동수단을 주목할 필요가 있죠. 벤자민이 타고 왔던 자동차와 비교했을 때, 버스는 목적지가 이미 정해져 있고 정해진 지역을 계속 맴돕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으며, 이미 사회가 정한 그 어딘가로 그들을 데려갈 것이란 걸 예측하게 합니다. 이 점에서 그들의 탈출은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부모님의 그늘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억압은 잠시 중단되었을 뿐이며 그들은 여전히 종속된 상황입니다..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시선은 버스 안에서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두 사람이 열심히 달려 맨 뒷자리로 앉았고, 승객들 모두가 그들을 바라보죠. (버스의 승객에 젊은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사회의 응시와 통제 속에 놓여있는 존재로,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응시 대상이 된 두 사람의 표정에는 기쁨의 감정이 없었고, (어쩌면 표현할 수 없고) 로맨스 영화의 엔딩에 등장하는 그 흔한 키스조차 있을 수 없었죠. 그들 앞에는 여전히 정해진 길들이 많이 있고,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있는 위험은 도처에 널려있을 것입니다.


너무 과하고 일방적인 독해라 말한다면, 지금 속해있는 우리 사회가 이 영화를 그렇게 해석하게 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야를 미국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1967년이 아닌 2015년의 젊은 세대로 옮겨보면 어떨까요.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없는 20대, 삼포세대, 88만원세대... 우리 사회 속 청년들의 졸업 뒤에는 더 큰 컨베이어벨트가 있을 뿐입니다. 더스틴 호프먼의 그 허망한 눈빛에 담긴 절망감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죠. 그의 눈빛에 있던 그 감정은 지금의 젊은이들 눈에 맺혀있습니다. 영화는 끝이라도 있었지만 현실은 계속되죠. 그렇게 절망은 지속될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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