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기#047 더 킹

<더 킹>의 결말은 그분이 꾼 꿈이다

스크린을 뚫은 영화
영화의 세 가지 균열
이 영화는 그 분이 꾼 꿈이다


<더 킹>은 다양한 의미에서 작정하고 만든 영화다. 형식과 내용, 그리고 작가적 메시지까지 한재림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원하던 바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게다가 정우성과 조인성이라는 이미지를 한 화면에 전시하기까지 했으니 비주얼 면에서도 한은 없을 것이고,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 정치 최악의 혼란기에 도착한 <더 킹>은 정치가 영화화된 작품인 동시에, 마지막엔 영화 스스로가 정치화하는 용감함을 보이기도 했다.



스크린을 뚫은 영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야기 속의 인물이 스크린 밖으로 말을 건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더 킹>이란 허구 속에서, 내레이션으로 극을 진행하던 박태수(조인성)는 마지막에 현실의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다. <더 킹>의 엔딩이자 우리의 현실이 해피엔딩이기 위해서는 관객이자 국민의 (투표에서의) 선택이 중요하다며 영화는 직설적 화법을 택했다. 관점이 뚜렷한 이 영화는 관객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노골적으로 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이고, 과감했다.


박태수의 내레이션은 촬영 후 녹음되었을 것이기에, 한재림 감독은 시국을 반영해(예를 들자면, 탄핵 가결과 조기 대선을 염두) 더 날카롭게 말을 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기회를 얻는 것도 힘든데, 여기에 감독의 정치관을 뚜렷하게 반영했다는 것은 상업영화로서 대담한 선택이고, 도전으로 보인다. 정치관에 따라 지지와 비판이 있을 <더 킹>. 어떤 평가가 있든 간에, <더 킹>은 근현대사를 경유해, 스크린에 깊숙이 칼을 박아 넣고, 벌어진 틈을 통해 현실로 탈주하는 특이한 영화다.



필요한 영화를 향한 시선

<더 킹>은 한국의 정치가 무너진 시기에, 상식과 정의의 정상화를 주장하는 ‘필요한’ 영화다. 영화 속의 현실을 모방, 패러디한 여러 장면은 유머의 요소이자 한국 정치를 향한 쓴소리이고, 정치에 신물 난 관객의 지지를 얻기 위한 선택이었다. ‘필요한 영화’라는 범주엔 2016년에 개봉한 <터널>, <판도라> 등의 영화를 언급할 수 있다. 이들은 영화의 서사 속에, 한국의 현실 정치를 환기하게 하는 이미지들을 담았고, 관객은 이에 반응했었다.


이렇게 영화가 재미라는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 외에, 현실과 소통하고 영향을 주려는 점은 반겨야 할 시도이다. 누군가는 영화가 왜 그래야 하냐고 싫어할 수도 있다. 즐기면 되는 영화를 너무 복잡하고,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영화라는 것은 창작자의 환경, 문화 등 국가와 긴밀히 연관되어, 무의식중에도 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시도와 작가적 메시지는 영화의 완성도 및 재미와는 분명 별개다. <더 킹>은 흥미로운 이미지가 많고, 신선한 연출이 인상적인 영화다. 그리고 한재림 감독의 메시지와 말하기 방식에도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여러 가지가 다 모인 <더 킹>이라는 큰 그림은 매력이 다. 한재림 감독의 전작 <관상>도 한국 3대 등장 씬으로 기억되는 수양대군의 그 장면이 기억에 남지만, 영화 전체의 짜임새는 아쉬움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더 킹>도 다 모아놓고 보면, 재미가 덜하고 아쉬움이 진한 영화다. 왜 이렇게 느끼는 것일까. 잡담이 길었던 이 글은 이 영화가 보여준 균열들의 한계와 성취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장르의 충돌

앞서 말한 느낌은 영화가 준비한 감정선에 몰입하기 힘들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두 장르 다큐(뉴스)멘터리와 허구의 충돌에서 온다. <더 킹>은 허구와 현실을 섞어 역(歷)사를 역(力)사의 역겨움으로 재해석했고, 볼거리가 많았다. 그러나 이야기의 굴곡이 많은 만큼 영화가 산만하다. <더 킹>은 소스로 활용한 뉴스 영상을 품어 하나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두 이질적인 장르 간의 충돌이 더 눈에 띈다. 뉴스 영상은 시대를 보여주는 용도로 저 혼자 시간의 순서대로 흐르고, <더 킹> 내부의 본 서사는 박태수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며 또 저대로 흘러간다.


다양한 시선으로 추한 근현대사를 통과하고 전시했지만, 결과적으로 둘은 잘 어울리지 않았다. 이 두 개의 장르 혹은 현실/허구가 만나는 지점은, 그러니까 서로 간섭하며 섞이는 지점은 ‘노무현’ 대통령의 등장부터다. 그때야 두 영상은 긴밀한 관계를 보이며 어우러진다. (이 긴밀한 관계에 관해서는 뒤에 따로 얘기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더 킹>의 출발선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었고, <더 킹>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그 시점부터 진짜로 시작되니까.



무드의 충돌

이 두 개의 장르가 붙지 않는 건, 다큐와 허구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가 시도한 재기발랄한 시도들(장면 전환에서의 다양한 카메라 워킹, 환각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표현, 다양한 오브제의 전시, 총알이 관통하며 하나로 묶이는 장면들 등)이 본 서사의 묵직함과 어울리지 못하는 점도 문제다.


<더 킹>은 실험적인 시도로 B급 무비의 마이너한 정서를 살리려 한 장면들과 본 서사의 무게감, 혹은 톤 앤 매너의 차이가 너무도 커 균열을 만든다. 무드는 일정함을 추구해야 한다. 완전히 밝거나 완전히 어두워야지, 밝으면서 어두우면 이도 저도 못된다. 그러니까 술에 물 탄 맛이 되고 만다. <더 킹>은 더 가벼워지거나 더 무거워지는 선택을 해야 했다. 한재림 감독의 해보고 싶었던 것, 괜찮을 것 같던 시도들이 모조리 합친 <더 킹>은 들쭉날쭉한 무드를 보여줬고, 이에 적응하고 몰입하는 게 쉽지 다. 관객은 다큐와 허구의 충돌에 이어 무드의 균열까지 이중고를 겪어야 한다.


이런 어려운 점들(다큐/허구, 그리고 무드)을 성공적으로 해내 영화가 있냐고 묻는다면, 아담 맥케이 감독의 <빅 쇼트>를 꼽겠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다룬 이 영화는 다양한 영상을 조합해 독특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다큐의 정서와 허구의 이야기를 동시에 추구한 이 영화는 괴짜들 앞세우는가 하면, 영화가 관객에게 직접 이야기하기도 하고, ‘마고 로비’ 등의 스타가 실제 이름으로 등장해 어려운 용어를 ‘욕실에서 설명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빅 쇼트는> 일종의 ‘병맛’ 코드로 영화를 하나로 묶어, 끝내주는 영화가 되었다.



이야기의 균열, 하지만 조화로운?

<더 킹>의 균열은 앞에 언급한 것 외에, 이야기 자체에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이 균열은 앞의 아쉬운 점과 달리 꽤 괜찮은 성취를 이뤄내 당황스럽. 이야기 전체로 보면 균열을 일으켜 따로 떨어져 나가지만, 그 부분 내에서는 영화 내내 실종된 조화가 다. 이는 한재림 감독이 ‘<더 킹>이 어디서 출발했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잊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성과로 보인다. 역으로 말하자면, 그가 ‘선택과 집중’에 더 공을 들이면 더 엄청난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를 하게 한다.


언급하고픈 이야기의 균열은 나락으로 떨어진 조인성이 쓰러져 병원에 가고, TV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장면은 절망으로 가득 찬 조인성의 모습에서 페이드 아웃, 암전된다. 사실, 여기서 영화가 끝나도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기승전결이라는 상업 영화의 일반적 서사 문법 내에선 이게 더 완벽해 보이는 끝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암전 후 새로운 챕터이자 마지막 챕터를 꾸역꾸역 시작하고, 굉장히 빠르게 내달린다.



우선, 이 암전 전후가 균열로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이전까지의 이야기에서 관객은 검사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철옹성을 어떻게 쌓았는지 봤다. 쉬운 예로, 사건이 감춰진 비밀 서재는 그들의 장벽이 얼마나 깊고 높은지 보여준다. 사건을 묵혀두는 그곳은 대한민국의 상한 부분이 더 썩어가는 곳이고, 부패의 악취가 나야만 할 것 같은 곳이었다. 그 외에도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조직 폭력배들,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이 철옹성을 보좌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철옹성이 암전 이후에 박태수라는 인물에 의해 모두 무너진다. 워터게이트의 ‘딥 쓰로트’의 사례에서 내부 고발자의 힘을 봤지만, 날개 꺾인 박태수의 활약으로 검찰의 부패가 척결된다는 결말은 너무도 안일해 보인다. 앞서 목격한 검찰의 강력하고, 비열한 모습을 봤을 때, 그리 와 닿지 않았다. 모든 게 너무 쉽게 해결되는 느낌. 박태수가 자신의 삶과 대한민국의 바로잡는 영웅이 되었는데, 이 영웅의 등장과 활약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 마지막 챕터, 암전 뒤의 무난한 전개는 개연성에 근거한 될 법한 상황이 아닌, 박태수가 바란 것, 그가 꾼 꿈의 발현으로 보인다. 복수에 성공하고픈 박태수의 꿈. 한 번의 선택으로 너무 멀리 와버린 그의 후회를 바로잡고픈 바람 실현된 시나리오 말이다. 암전이 만든 경계는 <더 킹>을 개연성이 작동하는 부분과 개연성을 초월한 부분으로 이등분한다. 그리고 이 개연성을 초월한 뒷부분이 어떤 이미지를 경유할 때, 이 챕터는 더 강력하고 무서운 힘을 얻다.



암전 후의 이 무난한 이야기가 힘을 얻는 건, 그리고 개연성이라는 걸 초월할 수 있는 건, 암전 직전에 등장한 노무현 대통령 이다. 생전에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 개혁 및 정의와 상식이 있는 사회를 바랐었는데, 그런 사회의 모습이 암전 이후의 이야기에 있다. 그가 바랐던 검찰 개혁과 부패세력의 척결이 그 부분에 있었다. 그래서 이 암전, 페이드 아웃은 박태수가 눈을 감는 장면인 동시에 노 대통령의 죽음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킹>의 결말은 눈을 감은 조인성의 꿈이자 죽은 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꿈으로 읽을 수 있고, 기이한 힘을 얻는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영화 전체와 잘 어울리지 않았던 마지막 챕터는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고, 바랐던 아름다운 결말이자, 감독이 전 대통령을 대리해 제시한 상식이 있는 사회의 모습이 된다. 그리고 한재림 감독이 작가로서의 메시지를 함축한, 강렬한 시퀀스가 된다. 앞서 허술함으로 지적되었던 다큐와 본 서사도 노무현 대통령의 등장에 와서는 서로 간섭하고 조화를 이룬다. 이야기 전체로 봤을 때, 따로 떨어져 나와 있는 이 부분이, 역설적으로 영화의 형식과 무드가 가장 잘 조합된 장면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그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더 킹>의 중심에 노무현 저 대통령이 있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가 진정 충격이었다. 이 영화는 거기서 시작됐다. 그날 잠이 안 와서 소파에 누워 있다가 뉴스를 봤다. 눈물이 나더라. 비극이고 굴욕이었다.” (씨네21 인터뷰 중)



한재림 감독의 또 하나의 성과 ‘데칼코마니’

한재림 감독이 시도한 것들이 조화를 보인 시퀀스를 하나 더 꼽자면, 시작 부분을 말할 수 있겠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뉴스 영상은 <더 킹>의 본 서사를 위한 환경을 세팅한다. 예를 노태우 정권의 범죄와의 전쟁은 한강식(정우성)의 배경과 힘의 근원을 세팅하는 데 적절히 이용되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오프닝의 ‘데칼코마니’라는 형식이다.


이 실험적 영상 속의, 데칼코마니는 ‘좌/우’가 같은 이미지다. 왼쪽이나 오른쪽이나 모두 같다. 이 이미지 내에선 좌/우의 의미가 없어진다. 이를 정치적으로 읽으면, 데칼코마니 내에선 좌파와 우파의 의미가 없다. 이 이미지를 통해 앞으로 볼 한강식과 박태수가 속한 검사의 세계에 좌우라는 이념이 의미가 없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념이 아닌 승자이자 권력의 편에 속하려는 부패 검사들의 태도를 ‘데칼코마니’가 미리 보여준 것이다.


하나 더, 이 데칼코마니를 ‘시간’을 이미지화한 것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즉, 왼쪽은 과거를 우측은 미래로 읽는다면, 과거나 미래나 같다는 걸 의미하게 된다. 이는 검찰의 태도가 시간에 상관없이 같을 것을 암시하는 이미지로도 바라볼 수 있다. 과거에나 미래에나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은 같을 것임을. <더 킹>이 보여준 검사들이 자신들의 부패를 복제하고, 나아질 가능성이 없어 보임을 ‘데칼코마니’가 상징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데칼코마니를 감독의 작가적 의지로 풀어본다면, 그에겐 좌/우가 의미가 없음을 뜻할 수도 있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좌·우파라는 정치·이념이 아닌, ‘상식’ 그 자체라는 의미로 의역해볼 만도 하다. <더 킹>이 정치적으로 읽힐 수 있으나, 상식(당연한 것)을 말하고 있음을 선언하며 데칼코마니를 배치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영화의 시작과 끝은, 앞서 지적했던 문제와 달리 형식과 무드가 적절히 조합된 시퀀스로 보인다. 결국, <더 킹>은 이를 채우는 중간이 균열을 보인 것이다. 그는 좋은 출발‘점’과 결말‘점’을 찍었지만, 그 둘을 이은 선은 아름답지 못했다. 뚜렷한 시작과 끝에도 그 중간이 희미해져 <더 킹>은 더 아쉽게 느껴진다.



죽음으로 죽음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한재림 감독은 여러 가지 균열 속에서도 <더 킹>의 출발지이자 도착지인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몇 가지 성취를 이뤘다. <더 킹>은 진한 아쉬움을 풍기지만, 한 사람을 추모하는 방법이며, 죽은 자의 꿈을 그려본 영화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이 꿈같은 일이 현실이 될 방법을 귀띔해 준다. <더 킹>의 최후방엔 조인성의 강렬한 이미지와, 그보다 더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가 배치되어 있다.


‘상식 있는 사회는 관객인 여러분(시민)의 선택이자 몫이다.’ 죽은 자의 꿈이 스크린을 뛰어넘어 실현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결국, <더 킹>의 관람자인 당신의 손을 빌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한재림 감독이 한 사람의 죽음에서 출발해, 현재 부패한 한국 정치의 죽음을 바란 <더 킹>. 올해 우리는 해피엔딩을 꿈꿀 수 있을까. 부패한 정치에 장례를 치러주고, 새로운 탄생을 목격할 수 있을까. 역시, 선택은 당신의 몫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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