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기 위한 오디션
소년과 소녀는 그들의 목숨을 배팅한 쇼에서 거짓 연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들의 연기에 캐피탈 시민은 넋을 잃었고, 이 로맨스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듯했죠. 그러나 그 엔딩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했고, 그들은 새로운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전작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은 어린 소년과 소녀들을 콜로세움에 몰아넣고 싸우게 했던 쇼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중계하고, 이에 열광하는 시청자들의 광기가 <헝게게임> 속에 있었죠.
캐피탈 사람들이 아이들의 살인 현장을 스포츠로 생각하며 응원하는 모습은 잔인하고, 기괴합니다. 이 불편한 뒷맛이 영화관을 나와서도 한동안 줄곧 따라다녀 찝찝했었죠. 그러다 TV 속 한 채널에 눈이 멈췄을 때, 알았습니다. 이 불편한 냄새가 영화관 밖에서도 풍기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열광하는 캐피탈 대중의 광기를 옮겨온 것만 같은 프로그램 <슈퍼스타K>. 최고의 가수가 되겠다며 심사를 받는 우리 시대 청년들의 얼굴들, 그리고 유희 혹은 관음에 대한 갈증을 보이는 대중의 모습은 <헝거게임>의 그것과 닮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매 시즌 악마의 편집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꾸준한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현실의 대중 역시 <헝거게임>의 대중처럼 매체가 보여주는 경쟁에 열광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에 목말라 있음을 엿볼 수 있죠. 가수가 되기 위해서 노래만 잘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이 이상한 서바이벌에서 참가자들은 일단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래서 대중이 원하는 옷을 찾아 입고, 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야기로 무장을 한 채, 카메라 앞에 서죠. 시청자는 참가자들이 난관,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에 시청자는 박수를 보내고, 그들의 어려운 과거사가 비극적 드라마로 다가올 때 감동합니다. 덕분에 시청자는 예비 스타들을 생존시키기 위해 문자 투표에도 기꺼이 참가하죠.
캐피탈 시민들은 넘쳐나는 욕망과 쾌락 속에서 더 자극적인 것을 원했습니다. 또 일부는 캣니스(제니퍼 로렌스)가 연기한 순수한 여인의 모습에 감동을 했죠. 그리고 우리가 ‘슈퍼스타 K’의 편집된 이미지들 속에서 원하는 것도 (콜로세움의 살육과는 다르지만) 자극(출연자들 간의 갈등, 분쟁)과 감동(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꿈을 이어오는 이야기)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굶주림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한국인의 삶 속에서, 대중들은 오디션이라는 극한의 서바이벌을 통해 한 줄기 희망을 보는 게 아닐까요. 우리 사회에 결핍된 것, 희망이라는 것에 대한 허기가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열광을 끌어내지 않았을까요.
청년 실업이 해마다 문제가 되는 시대에 취업은 생존을 위한 전쟁입니다. 청년들은 정규직 입사를 위해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죠. 자격증, 학점, 봉사 활동 등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취준생들은 자기소개서를 통해 먼저 심판을 받습니다. 이후 수차례 면접이라는 관문을 거쳐 끝까지 살아남은 자는 ‘취직’이라는 상을 손에 넣을 수 있죠. 2013년 방영한 <직장의 신>, 2014년에 방영한 <미생>이 풀어낸 정규직, 비정규직의 이야기는 시청자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사회가 얼마나 취업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죠.
<헝거게임>에서 모르는 구역에서 온 아이들은 서로 아무런 원한은 없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 외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하지만, 허락된 자리는 단 하나 뿐. 그래서 언제나 적이 될 수 있는 불안하고, 기괴한 동맹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매체, 캐피탈 시청자가 원하는 이미지를 입고 자신을 어필하기도 하죠. 아이들의 이런 모습은 우리가 접하는 현실 속의 오디션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취업 전선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습니다. 취업 활동 중에도 스터디 등의 그룹활동 등을 통해 힘을 모으지만, 현실 속에 준비된 왕좌는 제한되어 있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려면 누군가를 밀어내야 합니다. 웃으며 인사했던 오늘의 동료가 하루아침에 적이 될 수 있는 곳, 그곳이 취업 전선이죠.
그런데 우리 시대는 캣니스보다 독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캣니스가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며 악몽을 꾸는 것에 비해, 우리 사회는 취업 후 취업 시스템의 부조리함에 무감각해지죠. 애써 얻은 왕좌를 지키기 위해 심판자들에게 머리를 숙인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 시스템에 들어간 자들은 상부구조가 원하는 방향으로 밖엔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내 밥그릇, 내 가족 등 챙겨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닌 세상입니다.
이 와중에 매체는 영웅을 만들어 대중을 사회 시스템에 순응하게 합니다. 캣니스의 치열한 선택과 사랑이 시청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듯, 우리 사회의 매체도 개천에서 용 난 사람의 이야기를 더 부각하고 강조하며 아름답게 포장합니다. 배관 수리공의 오디션 우승을 비롯해, 매체는 약자들의 역경과 노력에 포커스를 맞추죠.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꿈만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으며, 개인의 노력에 따라 미래는 바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역경을 극복하여 왕좌를 획득하고, 시스템의 상부 구조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입니다. 패자들이 왕좌를 획득하지 못했다고해서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죠. 그래도 매체는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해서는 절대 언급하지 않으며, 어마어마한 노력을 한 영웅을 만들어 사회가 인정하게 합니다. '저 정도 노력을 해야 왕좌를 가질 수 있구나' 매체는 좋은 학원에 가고, 고액 과외를 받아 좋은 대학에 갔다는 이야기 등을 절대 다루지 않죠. 카메라는 역경에 처한 인간을 비추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돕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들의 환경을 변화시킬 가능성도 적습니다. 대신에 그들을 이용해 영웅서사시를 만들어 사회의 주류 시스템에 순응하는 장치로 이용하는 거죠.
<헝거게임: 캣칭파이어>에서 다시 한 번 헝거게임에 참여한 캣니스는 우승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 우승으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죠. 그래서 그녀는 다른 길을 찾습니다. (피타를 살리기 위해 죽으려는 선택도 있었지만) 그녀가 찾은 길은 경기장을 부숴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헝거게임의 매뉴얼에 없는 길이죠. 캣니스는 캐피탈이 만들고 재생산하는 광기의 오디션을 중단하려 했습니다. 이처럼 경기장을 부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은 캐피탈, 헝거게임, 그리고 스노우 대통령에 대한 도전이고, 영화는 이를 ‘혁명’이라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 혁명의 최전방에는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에 몸부림치는 캣니스가 서 있습니다.
이 영화의 엔딩에서 <설국열차>의 엔딩이 생각났습니다. 기차 밖의 문에서 희망을 찾은 남궁민수(송강호)는 경기장을 부수고 기존 시스템을 부정하는 캣니스의 모습과 닮은 점이 있죠. 그들은 모두 현존하는 구조 밖에서 답을 구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설국열차>의 살아남은 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의 선택도 캣니스의 선택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커티스는 기차의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었지만, 기차를 부수는 선택을 하죠.
커티스와 캣니스는 가진 자, 살아남은 자들은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재생산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기존의 부조리한 룰을 거부합니다. 두 영화에서 부서지는 경기장과 기차를 보고 신났다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경기장과 열차가 폭발하는 화려한 스펙터클에 들떴던 것일까요. 혹은 부조리한 세상이 붕괴되는 광경이 통쾌했던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