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역사, 재현의 의미
<노예 12년>은 자유인으로 시작해 자유인으로 돌아오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유라는 말로 글을 시작했지만, 실상 이 영화는 철저히 수동적 상황에 머물 수밖에 없던 흑인이 중심에 있죠. 솔로몬 노섭은 주인공임에도 무기력하고 스스로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없는 약자에 불과한데, 때문에 그가 자유를 되찾는 장면은 그의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다른 동료)을 구원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패배자의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이름을 되찾고 집으로 돌아와 그가 가장 먼저 뱉었던 말도 환희에 찬 외침이 아니라 ‘미안하다’는 울음이었죠. 이는 동료를 남기고 도망친 것에 대한 자책이었을까요. 아니면 팻시를 보고 아내를 떠올렸듯이, 이번엔 아내를 보고 남겨진 팻시가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요. 마지막에서야 온전히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켜, 소리 내 울 수 있었던 그 장면이 유독 기억에 남습니다.
자유인에서 자유인으로 돌아온 솔로몬 노섭의 공백기엔 플랫이었던 노예의 삶이 있습니다. 그는 그의 계급 말고는 변한 것이 없었던 ‘1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세상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노예 해방을 외치게 되죠. 이 영화를 읽는 방법은 관객마다 다르겠지만, 한 인간이 가졌던 생존에 대한 의지와 자유를 열망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면 감독은 (어쩌면)아쉬워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의 구조처럼 관객 역시 일상에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 사이엔 <노예 12년>이라는 체험이 있었죠. 당연히 흑인 관객에겐 분명 더 뜨거울 영화입니다. 그렇다면 흑인이 아닌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혹은 가져야 할까요.
민주주의의 국가 미국의 과거를 비추는 <노예 12년>은 지금의 미국에게는 이질감을 불러올 수 있는 영화입니다. 퍼거슨시 사태 등이 일어나는 것처럼 여전히 인종차별 논쟁은 끝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혹은 그 인종차별 문제의 깊은 골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를 채찍질하며 상기시킨다는 점에서도 그렇죠. 더불어 이 영화의 가장 큰 가치는 주류 역사에 묻혀있던 정서를 읽게 해준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고 강대국으로서,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미국은 정의 그 자체로 대중문화에 등장했고, 덕분에 그들의 과거도 그렇게 정의로웠죠. 하지만 정말 그렇게만 바라봐도 되는 것일까요? <노예 12년>은 과거를 다른 방법으로 조명하고 있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래 주인이었던 원주민들은 영화에서 어떻게 그려졌었나요. 대개의 과거 미국 영화에서 인디언은 미국인의 마을을 침략, 습격하는 약탈자로서 그려졌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은 정의롭지 못한 종족, 무찔러야 하는 존재로 표현됩니다.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인디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제시되고, 인디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만들어지며 미국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지만, 아직은 강대국의 왕좌가 그 어떤 역사적 진실보다 강력해 보입니다.
<노예 12년>은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무게에 짓눌려 묻혔던 과거를 재현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집권 이후에 나타난 현상일 수도 있고, 비미국 영상인의 미국 진출과 성장 등이 이유일 수도 있으며, 달라진 흑인(흑인 배우)에 대한 위상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국가의 무게에서 벗어나, 개인의 역사가 대중에게 소개되었다는 점은 과거를 새롭게 볼 수 있게 할뿐만 아니라 우리가 큰 반발 없이 받아들이고 암기하는 역사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반겨야 할 것입니다.
‘링컨은 노예제를 폐지했다’라는 한 문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을까요. '링컨'이라는 미국 대통령의 위대함? 자발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고자 했던 미국 조상의 윤리성? 저 문장은 미국을 노예제 이전과 이후로 분리시키고, 노예제 이후의 미국만이 지금의 미국과 연관되어 있다는 정서를 강요하는 듯 합니다. ‘노예제’라는 과거는 묻히고, 이를 해방한 윤리적이고 정의로운 미국의 행동만 부각되는 듯한 느낌이죠. 대체 왜? 저 한 문장의 글로는 이해할 수 없는 ‘노예제’에 대한 감정적 몰입의 차단, 그리고 지금의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풍기는 어떤 민주적인 향기가 있습니다. 거창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대중의 의식은 미국에 너무도 우호적인 것 같습니다.(이것을 이데올로기의 작용으로도 볼 수 있을까요)
이런 거시적인 역사, 이데올로기가 쓴 역사가 할 수 없는 일을 영화 <노예 12년>은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합니다. 관객은 노섭이라는 인물의 역경, 고난을 보죠. 그리고 그 시대의 비인간적 환경 속에 살아야 했던 인간의 처절함과 발버둥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합니다. 덕분에 노예제와 과거 미국의 불합리함에 대해 생각하고, 분노하며 일부는 슬픔까지 그 정서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개인의 공감을 통한 역사적 접근은 과거를 더 풍부한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죠. 그리고 현시대의 주류 역사관에 묻혀 질식하고 있는 '어떤 개인'의 삶을 떠올리게 할 가능성까지 가질 수 있습니다.
<노예 12년>은 잊혀진 역사를, 피 흘린 자들의 시점에서 보여주고 되살리는 영화입니다. 극영화가 문자로 기록된 역사책과 달리 더 잘 할 수 있는 일, 감정적 몰입이 역사의 재현에 있어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노예 12년>. 이 영화는 과거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색다른 역사 교육의 창으로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