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화 일기#020 한공주

‘나오지 마’라는 무언의 속삭임 그리고 수치심

그녀는 살았을까?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마지막 장면을 마주하고 있으면, 영화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둠 외에도 무엇인가가 객석을 잠식하고 있는 듯해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녀가 물에 잠기는 순간 영화관도 가라앉는 그 느낌에, 얼른 영화관 밖으로 뛰쳐나가서 빛을 보고, 공기를 마시고 싶었죠.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는 순간은 마치 물이 차올라 객석이 수면 아래로 침전하고 있다는 공포를 던져줄 정도였습니다. 끝없이 공기를 갈구하게 하는 이야기, <한공주>는 그런 영화입니다. 이 땅에서 숨 쉴 공기를 잃어버려 물속에서 공기를 찾아야 하는 소녀의 이야기. <한공주>는 사회가 어떻게 피해자를 숨 막히게 하는지, 피해자를 감싸고 있는 개인들이 얼마나 무심하고, 혹은 이기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줬습니다.


침전하는 객석

부족한 산소에 허덕이는 한공주의 심리를 천우희는 무표정으로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분노, 즐거움, 아픔, 고통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죠. 기괴함 마저 느껴질 그 얼굴에서 관객은 질식 직전인 소녀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이 표정은 사회에 짓눌린 자의 허탈함일 수 있고,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소녀의 무력함의 표현일 수도 있으며, 이미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는 체념과 절망의 표출일 수도 있죠. 그녀가 물에 뛰어드는 것은 예정되어 있던 절차라고 얼굴에 새겨져 있는듯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수영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 수영이 어떤 의미가 되어줄 수 있었는지, 그녀도 몰랐겠지만 말이죠. 예정된 순간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물에 뛰어드는 그 순간, 혹시나 삶에 대한 미련과 의지가 생길까 봐, 죽음이 두려워 질까 봐, 자신의 표정에 균열이 생길까봐 그녀는 물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두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엔딩에서 그녀는 헤엄치고 있었죠. 하지만 물 밖으로는 나오는 모습은 볼 수가 없기에, 그녀가 삶과 죽음 중 무엇을 택했을지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녀가 물속에서 자유를 느꼈을 것이라 믿고싶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헤엄을 치는 그 순간으로부터 무모하면서도 자유로운 글쓰기를 시도해 봅니다.


욕망의 재현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어떤 욕망의 재현으로 보려 합니다. 그렇다고 한 소녀의 삶을 빼앗아간 남성의 추악한 욕정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한공주>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야기를 보여주지만, 사실 스크린 밖에 있는 이 사회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보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욕망이 공주를 물로 뛰어들게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스크린 밖에 있는 사람들의 욕망이 이 영화에 투영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우선 영화에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왜 한공주는 피해자였는데 도망쳐야 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표면적' 이유는 도를 넘은 자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여기서 시작한 가해자 부모의 이기심이 공주를 숨 막히게 하죠. 부모들은 단 한 사람, 공주만 합의해주면 모든 아이가 죄가 없어질 것이라 믿으며, 두꺼운 얼굴을 당당히 내밉니다. 그들 자식이 범한 범죄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죠. 심지어 그들에게 이 사건은 공주가 원인을 제공했고, 들에게 공주는 자식들의 앞길을 막으려는 나쁜 년일 뿐입니다. 공주 한 명의 아픔과 상처보다, 더 많은 아이의 미래가 중요하다고 믿는 가해자 부의 논리는 공리주의의 극단이자 폐단을 보여주죠. ‘나’, ‘내 자식’이 소중하다는 그 외침에서 잘못된 자식 사랑과 적반하장의 이기심을 목격했습니다.


여기에 자식의 상처를 돈으로 승화시키는 공주의 아버지가 끼어들면, <한공주>는 개인의 가질 수 있는 추악한 이기심을 꽤 다양하게 진열하는 데 성공합니다. 공주만큼은 제 자식이 먼저라는, 이기적인 부모가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그녀는 더 비참해지고 고독해지죠. 이렇게 다양한 개인들이 만든 이기심에 베이고, 소외감을 느낀 공주는 물로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됩니다.


사회가 강요한 수치심

하지만 이러한 개인의 이기심 보다, 사회의 시선과 이 사회에 작용하고 있는 의식 구조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공주는 피해자이지만 성폭행의 피해자라는 점에서 사회의 이중적인 시선을 감당해야 했죠. 불쌍한 소녀인 동시에 ‘성’이라는 금기를 깨버린 일의 중심에 있으므로, 그녀는 자신을 감추고 숨겨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녀가 어떠한 표정을 낼 수 없었던 것도 그녀가 스스로를 드러내서는 안 되는 상황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사회는 그녀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동시에, 그녀가 겪은 사건 자체를 불쾌하고, 수치스럽게 여겨 그녀를 피합니다.


왜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수치심을 느낄까요? 수치심이 무엇이기에. 서양에서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을 수치심이라고 합니다. 가령, 서구의 오래된 서사시 <일리아드>를 보면 귀족 출신의 영웅 자신이 전장에서 싸우지 않고 도망간다면 귀족일 수 없다고 말하죠. 이렇게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언급하며 영웅들은 수치심에 대해 말했습니다. 즉, 서양에서는 기원전 8세기부터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할 때, 수치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공주>에서 공주가 겪은 일에서 사회가 느끼는 수치심은 무엇일까요. 공주가 다하지 못한 의무는 무엇일까요. 여자로서의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우리네 전통적 관습을 스스로 방어하지 못했다는 것일까? 그녀를 이 상황에 처하게한 행실을 탓해야 했을까? 이 지점에서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대상은 바뀌었고(가해자에서 피해자로), 피해자로서의 공주의 위치도 변합니다. 하지만 수치심은 공주가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고,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없는 친구, 부모, 가족, 더 나아가 사회가 가져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공주는 억지로 수치심을 느껴야 했고,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혹은 이 사회가 자신과 함께할 수는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결국 물속으로 뛰어들죠.


영화에서는 공주에게 주어진 희망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잠시 찾아온 행복도 결국은 그녀의 상처가 드러날 때, 찢어져 버릴 것으로 예상할 수 있죠. 공주가 인터넷에 보내는 강박에서 알 수 있듯, 그녀는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도 지울 수 없는 ‘성폭력’의 낙인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금방 깨어질 것처럼 보였고, 그때 그녀가 보이는 미소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기에 안타까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실화 바탕이라는 점에서 이는 매우 섬뜩한 영화죠. 공주가 있던 곳이 실재 우리의 사회고, 우리 사회가 공주를 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성폭력과 관련된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이 금기시되는 분위기가 있죠. 역시나 앞에 말한 수치심 때문에.


우리 사회가 느끼는 수치심의 투영

이제 글의 서론에 말했던 문제를 다시 가져올 시간입니다. <한공주>는 우리 사회의 어떤 욕망의 투영된 영화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욕망을 구체화했을 때, 잔인하고 비정한 진실을 대면할 수 있죠. 그 어떤 욕망은 수치심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한공주가 가져야 할 수치심은 아닙니다. 즉, 피해자가 느껴야 할 수치심은 아니라는 거죠. 대신에 우리 사회가 책임져야 할 수치심과 관련된 것이라 말하겠습니다.

영화에 삽입된 수치심은 우리 사회가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 하는, 꺼내지 않으려는 종류의 것입니다. 사회는 그 사회가 가지는 수치심을 인정하기 싫었죠. 우리 사회는 두 눈을 뜨고 있음에도, 그녀가 당한 범죄를 예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범죄 이후엔 그녀가 상처를 씻고 함께할 방법을 마련하지 못했고요. 오직 외면이라는 방법을 통해 사회는 안정을 찾고,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며, 미봉책 잠깐 마련할 뿐입니다. 우리 사회가 마주하기 싫어하고, 피하고 싶었던 그 수치심을 감춰야 했기 때문에 결국 공주를 물속으로 도망치죠. 사회는 무관심하고 싶었고, 소녀의 아픔을 바라보고 싶지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는 수치심에서도 스스로 (공주의 허락도 없이) 벗어납니다.


사회는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기에 공주에게 수치심을 부과할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수치심을 느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선정적 사건으로서의 관심을 넘어 공주의 아픔을 소환하지 못했죠. 자기 일이 아니기에 안도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공주는(그리고 이 사회의 공주들은) 여전히 상처를 안고 있고, 그녀에게 보내는 사회의 시선은 상처의 틈을 파고들어 아물지 못하게 합니다. 숨이 막히는 상황이죠. 이런 상황에서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했을까? 물에 뛰어들어 생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는 방법을 택해야 했을까요. 아니면 상처가 부패하더라도 꾹 참고 버텨야 했을까요.


무언의 속삭임 ‘나오지 마’

그런데 만약 한공주가 물에서 헤엄쳐 나왔다면 행복한 삶으로 복귀할 수 있었을까요? 변하지 않은 구조 속에, 사회는 계속 그녀를 숨기며, 다시 그녀의 공기를 고갈시켰을 테고, 그녀를 또 다른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그녀는 사회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존재였고, 영화에서 죽어야만 하는, 즉 우리가 외면하고 꺼내고 싶지 않으려는 존재입니다. 영화가 욕망의 표현이라면, 사회가 외면하고 싶다는 욕망이 영화 <한공주>에는 투영되었던 거죠. 그녀가 물에서 나오지 않고 죽어야만, 언급되지 않아야만 억지로라도 이 사회가 평화롭게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수많은 불합리와 모순, 그리고 정의를 외면한 채 이 사회가 물에 빠진 그녀에게 외치고 있는 듯했습니다. ‘물 밖으로 나오지 마’

매거진의 이전글영화 일기#019 노예 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