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라이더>에 관한 잡담
2월 네 번째 주에 개봉한 <싱글라이더>와 <23 아이덴티티>는 여러 가지로 극단적인 차이를 보인다. 차분한 감정선을 원하는 영화와 극도의 긴장감을 원하는 영화. 힘을 최대한 빼야 했던 캐릭터와 언제나 광기를 보여줘야 했던 캐릭터. 그리고 카메라의 정적/동적인 차이와 영화의 템포까지. 2월 26일까지의 성적을 보면 <23 아이덴티티>는 96만, <싱글라이더>는 26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극장에서 선호하는 영화가 자극이 강한 영화라 이런 결과가 있었을까. 상영관 확보 등의 이야기는 뒤로하고, <싱글라이더>의 부진에 관해 생각하고, 잡담해보는 시간을 가져봤다.
이전에 프리뷰에서 썼듯, <싱글라이더>의 최대 강점은 시나리오다. 참여한 배우들이 경쟁하듯 시나리오에 관해 칭찬하기 바빴다. 그런데 좋은 시나리오란 무엇일까? 좋은 시나리오란 이야기의 구성이 탄탄한 것은 기본이며, 그 무엇보다도 관객의 머리 혹은 심장에 박힐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논리적으로든 감성적으로든 어필하는 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 핵심(반전)을 끝까지 감추며, 관객과 머리싸움을 하는 이성적인 시나리오. 이야기가 가진 정서를 모두 전달하려는 감성적인 시나리오. 이 두 면을 오가면서 시나리오는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싱글라이더>는 무엇을 어필하는 시나리오였을까. 차가운 톤의 영화는 이병헌의 얼굴과 함께, 절망과 허무의 정서를 전달하는 데 무리 없이 성공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야기의 ‘반전’을 통해 그 이상을 추구하는데, 이 지점에서 매력을 보이지 못했다. <싱글라이더>가 준비한 '죽은 자의 시점'이란 설정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그 반전이 드러나는 과정과 그걸 마주하는 순간, 그리고 그 이후가 전달하는 ‘반전 이상의 것’이 영화엔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이 반전은 영화에서 홀로, 따로 놀고 있는 모양새다.
반전이라는 건, 충격의 정도에 따라 우위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구성과 반전을 보여주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극의 주제와 잘 어울릴 때, ‘좋은’ 반전이 된다. 반전 홀로 튀어나온 영화는 반전이 공개되면, 이야기도 힘을 잃는다. 하지만, 좋은 영화의 위대한 반전은 그 반전 자체가 영화의 재미를 죽이지 않는다. 마틴 스콜세지의 <셔터 아일랜드>는 충격적 반전이 있는 영화였는데, 그 반전을 알고서 바로 했던 생각은 ‘이걸 아는 시점에서, 다시 관람하고 싶다’였다.
영화가 추구했던 반전이 아쉽긴 하지만, <싱글라이더>는 반전만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싱글라이더>는 ‘반전’에 방점이 찍혀 입소문을 탔고, 이는 관객의 관람 경험에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반전이란 소문을 듣고, 객석에 앉은 관객은 영화와의 머리싸움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싱글라이더>는 엄청난 비밀을 숨긴 듯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그 비밀에 점점 관심이 없어진다. 스릴러 등의 장르를 기대하고 온 관객은 원하던 이야기가 없기에 지치고, 영화와 관객 사이엔 간극이 생긴다. 즉, 관객이 소문으로 듣고 기대하던 장르와 마주한 영화가 다른 것이다. 스릴러를 기대한 관객이 스릴이 없는 영화와 마주할 때, 그 관람은 기대를 배반한다. 이렇게 <싱글라이더>는 장르적 오해 때문에 손해를 보는 지점이 있었을 것이다.
<싱글라이더>를 보고, 가장 많이 하게 될 말은 ‘반전 죽인다’, ‘재미있다’보다는 ‘치치가 귀엽다’일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많이 하게 될 말은 ‘이병헌 연기 잘한다’가 아닐까. 이전에 쓴 프리뷰에서 이 연기의 뛰어남을 목격하는 게 ‘지겹다’는 망언을 했을 정도로, 그의 연기는 여전히 뛰어나다. 최근 장르적 색채가 진한 작품에서 강하고 선이 굵은 캐릭터를 맡은 이병헌은 <싱글라이더>에서 피로하고 지쳐있으면서 표정을 숨기는 캐릭터를 맡았다.
좋은 연기는 무엇일까. 자연스러운 것? 폭발하는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것? 극에 몰입하게 하는 것? 관객이 뭔가를 느끼게 하는 것? 매소드 연기 등 연기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고, 배우별로도 ‘성격파 배우’ 등의 구분이 있는 등 연기의 범주는 무수히 많다. 기준도 다양할 것이다. 그래서 연기를 비교함에 있어 가장 모범적인 답은 ‘연기는 비교할 수 없다’가 아닐까. 그래도 잡담을 다룬 이 글에서는 극도로 주관적인 연기론에 관해 풀어놓을까 한다.
좋은 연기란, 영화의 목적에 부합하는 연기가 아닐까 싶다. 앞의 모범적 대답만큼이나 모호하고, 주관적일 수 있는 대답이다. 하지만, 영화의 관람 후에 “‘저 연기’는 ‘저 영화’와 하나가 되었네”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한 배우가 하나의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했네’와는 조금 다르다. 연기가 영화의 주제와 통일성이 있고, 어울린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병헌은 항상 최고의 연기를 보인 배우다. 캐릭터의 개성이 드러나야 했던 <내부자들>에서 그는 영화에서 가장 잘 보여야했고, 그런 연기를 해냈다. 반면, <싱글라이더>에선 영화의 무드와 배경과 하나가 되어야 했었다. <싱글라이더>에서 그는 돋보이는 연기를 하지 않았고, 그 덕에 영화가 끝난 뒤, 가장 인상적이었다.
연기는 늘 목격함에도 신기한 영역이다. 그리고 실제 배우의 내/외적 '이미지'가 관객에게 영향을 주기에 복잡하기도 하다. 이런 이미지를 영화의 캐릭터 이전에 관객에게 각인되어있는 ‘인상’이라고 하면 될까. 이 이미지(스타성, 도덕성 등)가 연기를 보는 입장에선, 평가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되기도 하니, 정말 까다로운 것이다. 더불어, 사생활이 배우의 캐릭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하면, 배우로서 사는 건 무척 고단한 일로도 보인다.
이 이미지에 관한 잡담은 ‘안소희’를 말하기 위해 꺼낸 것이다. <싱글라이더>에 관한 평 중, 안소희의 연기에 관해 비판과 비난이 많이 보여 고민해봤다. 안소희는 연기를 못 했는가. 개인적으로는 극에서 몰입을 방해할 정도의 롤을 부여받지도 않았고, 연기도 비난을 받을 만큼은 아닌 것 같다.
<싱글라이더>는 차분한 무드 덕에, ‘나 지금 연기하고 있어’라는 리액션이 타영화보다 더 과장되어 보일 수 있는 영화다. 과연, 안소희는 그 정도로 오버했을까? 그전에, 그럴 지점이 있기는 했을까. 다시 이미지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자. 이미지는 일종의 ‘낙인’이다. 안소희에겐 전직 아이돌이라는 인장이 있다. 그리고 ‘아이돌=연기를 못하는’이라는 낙인이 대중에겐 은연중 깔려있다.
이 낙인이 정말 무서운 이유는 연기의 퀄리티를 떠나서 관객의 몰입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싱글라이더>의 안소희는 그녀가 가진 낙인 때문에, 등장하기 전부터 불신을 줄 수 있다. 안소희가 연기를 잘 하거나 못하는 건 다음의 문제다. 그녀의 낙인은 관객이 그녀의 연기에 불안감을 가지게 하고, 관객이 연기와 영화에 몰입하는데 방해요소가 된다. 이미지만으로 방해요소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연기는 정말 다양한 면이 영향을 끼치는, 복잡한 영역이다.
편안한 마음에서 영화를 생각하다보니 잡담이 길어졌고, 정작 중요한 내용엔 접근하지도 못했다. 이제, 정말로 <싱글라이더> 자체에 관해 말해보려 한다. 이 영화는 소중한 것에 무심했던 이들이 맞이한 파국을 보여주는 영화다. 가족을 타국에 보내놓고, 잘 될 것이라 믿었던 재훈은 붕괴한 가정과 멀어진 관계를 마주한다. 그리고 상의 없이 재훈에게 귀국을 일주일 미뤘던 수진(공효진)은 남편의 시체와 마주했다. 둘은 미래를 원해 많은 걸 유예하고 견뎠지만, 남겨진 건 상처와 이별이었다. 이들은 막연하고 실체 없는 믿음에 기댔고, 파국을 맞이한다. ‘실체가 없는 믿음.’ 이게 <싱글라이더>의 핵심이다.
<싱글라이더>를 도식화하면, 막연한 믿음을 보낸 사람들은 그 댓가를 치른다. 첫 번째 믿음의 희생양은 재훈을 믿었던 고객들이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상품에 투자해 그들은 재산을 날리고, 삶이 위태로워졌다. 그 다음 희생양은 지나(안소희)다. 그녀는 돈을 구하고자 잘 모르는 사람을 믿었다가 살해당했다. 이 두 부류의 희생자가 모두 돈을 마련하다가 비극적 상황을 맞이했다는 공통점은 좀 섬뜩하다. 고객들은 편히 돈을 벌려고 했고, 지나는 수수료를 줄이려다 그렇게 되었다. 이는 사회 시스템이 정한 보편적 방법 내에서 부를 축적하라는 경고로 보인다. 아니면, 현 사회 시스템이 유독 약자에게만 요행을 바라지 말 것을 강요하는 것 같아 잔혹해보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재훈이 있다. 재훈은 고객들에게 믿음을 받은 자이자, 가족을 (방치하긴 했지만) 믿은 자라는 점에서 이중적인 위치에 있다. 그런데 그가 믿었던 가족은 붕괴되어 있었고, 그것을 목격한 재훈은 상처를 받는다. 심지어 재훈은 믿었던 직장 덕에, 고객들의 믿음을 배신한 자가 되기도 한다. 그 결과 그는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밖으로 밀려난 자가 되었다. 재훈은 막연한 믿음을 제공하고, 그 스스로 막연히 믿기도 한 자였고, 영화에서 가장 큰 벌을 받는 자가 된다. 더불어 종교적으로 자살이 가장 큰 죄라면, 그는 신에게도 믿음을 져버린 최악의 위치에 서게 되지 않을까.
이 ‘믿음’이란 코드가 재미있게 표현된 건, 재훈의 집에 장치된 이중 안전장치다. 재훈과 수진은 범죄가 두려워 안정장치를 이중으로 설치했다. 그 장치를 가장 안전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그 장치 때문에 재훈이 더 늦게 발견 되든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 장치가 없었다면, 막연히 그 장치를 믿지 않았다면, 재훈은 살 수 있었을까.
<싱글라이더>에 관한 글엔 ‘가장’이라는 단어도 종종 보인다. 이 영화를 가장의 잔혹사로 봐도 괜찮을까. 타인에겐 믿음을 팔고, 자신의 믿음은 갈 곳을 잃은 재훈의 모습을 이 시대 가장의 모습으로 보편화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본 의도와 달리, 천민자본주의 내의 경제 활동을, 허구를 믿음으로 상품화하는 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싱글라이더>는 가장의 잔혹동화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싱글라이더>에서 정말 슬픈건, 재훈이 믿음을 팔 때, 적어도 그 자신은 그 믿음을 진짜라 믿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죄책감과 책임을 느끼고 죽음으로 걸어간다. 그런데 진짜 벌을 받아야 할 이들은 누구였을까. 이 시대의 소시민 가장들 위에서 믿음을 가지고 장난친, 이 신앙을 기반으로 가짜 신 행세를 한 자들은 누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