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로봇 히어로를 더 좋아하세요?
‘위이잉 철커덩, 위이잉 철커덩’ 묵직한 기계 관절이 움직이는 소리와 동시에 날카로운 금속의 울림이 그가 도착했음을 알립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하겠죠. ‘My name is Robocop’ 영화만큼이나 유명한 개인기의 소재인 로보캅이, 과거보다 더 맵시가 있는 수트를 입고서 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영화를 어떻게 기대했을지는 모르겠지만, 20여 년 전의 폴 버호벤 감독의 원작(1987)과 비교해 더 세련되고 진보한 액션과 볼거리를 기대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원작을 아끼는 팬들은 그들의 로보캅이 훼손되지는 않았을지 발을 동동 굴리며 걱정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비교 대상은 원작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원작에서 던진 기계와 인간 사이의 갈등 외에도, 브라질 출신의 호세 파딜라 감독의 로보캅은 차별화된 시선으로 영웅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이는 현재 헐리우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웅 <아이언 맨>과 비교해 본다면 더 뚜렷이 드러나고,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헐리우드 밖에서 온 비미국인 감독이 바라보는 미국의 기술, 경제, 정치 등에 대한 시선과 함께 <로보캅>의 이야기 구조는 미국 영웅들의 집합소 마블 스튜디오의 그것들과 많이 달랐죠. 그래서 기존 히어로 영화에 익숙한 관객은 <로보캅>을 보고, 그들이 기대했을 이야기와 볼거리가 없음에 불만족하고, 영화 전체에 깔린 암울하고 답답한 분위기에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로보캅>은 재미만을 목표로 한 오락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화려하고, 위트가 있는 매력 덩어리 현대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죠. 대신에 기계가 없으면 당장 죽음과 인사를 나눠야 하는 비참한 가장의 암울한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마블에서 만드는 영웅의 이야기들은 과거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들이 보여준 이야기와 구조가 닮았습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오래된 이야기의 형태이자 구조인 신화는, 비범한 능력을 갖춘 주인공이 자신을 위협하는 거대한 적대자를 만나면서 시작하죠. 이후 영웅은 갖은 고난을 넘기며 조력자의 도움을 받고, 적대자를 없앨 방법을 알게 되며(혹은 무기를 획득합니다. 득템!), 최후에 적대자와 결전에서 승리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페르세우스, 테세우스 등의 신화를 떠올리면 이러한 틀의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죠. 마블의 ‘어벤져스’ 영웅들의 이야기는 변형이 있을지라도 이 단순한 골격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이러한 신화적 구조는 오랜 세월 겪어온 이야기의 원형이기에 대중에게 가장 익숙하죠. 덕분에 관객은 간단한 전개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하며, 아예 대놓고 특정 장면을 기대하고서 영화를 관람하기도 합니다. 즉, 영웅과 적대자가 펼치는 최후의 결전을 기다린다는 건데, 이 때문에 이러한 표현도 가능하죠. ‘영웅 서사구조는 결국 최후의 전투를 향해 가는 달리기다’
마블 스튜디오는 이 구식의 구조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으며, 대중이 열광할 지점을 정확히 포착, 계산해두고 영화를 제작하여 엄청난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마블의 해마다 계속되는 연타석 홈런을 삐딱하게 바라본다면, 근래의 관객은 별것 없는 이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에 너무 적응해버렸죠. 이미 아는 이야기를 보고, 지갑을 털리는 독특한 소비자들이 영화관에 앉아있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로보캅>은 이 전형적인 영웅 플롯을 따르지 않습니다. 마블이 외부에 적을 만들고, 아이언 맨에게 더 큰 능력과 업그레이드된 무기를 부여하는 것과 달리 <로보캅>은 내부에 적을 두고 갈등하게 하죠. 영화에서 등장하는 기업, 언론 등의 기관 안에 숨어있는 적들을 말하기 위해 ‘내부’라는 말을 쓴 게 아닙니다. <로보캅>에서 가장 주된 갈등은 ‘알렉스’라는 인간과 '로보캅'이라는 기계 인간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아내와 아들을 보며 인간처럼 살기 위해서 기계에 의지해야 하지만, 로봇 병기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그는 인간이기보다는 기계처럼 되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져버렸네요.
끝으로 적을 무찌르면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는 긍정적 결말을 가진 <아이언 맨>의 이야기와 달리, 로보캅은 적을 무찌르고 나서도 맘 편히 웃을 수 없습니다. 기계와 인간의 경계에 선 알렉스의 위치는 쉽게 풀리기 어려운 성질의 문제이기에, 그의 승리로 완벽한 결말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죠. 때문에 <로보캅>은 근래의 히어로 영화처럼 결말에 환호, 열광, 희열의 감정이 드러날 수 없으며, 관객은 철학적이고 시사적인 의문과 고민에 휩싸이며 영화관을 나서게 됩니다. 누가 승리했고 정말 웃을 수 있었을까. 알렉스는 평생 인간성과 주체성에 대해 갈등하며, 로봇에 갇혀서 지낼 불쌍한 존재로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아이언 맨>이 시리즈 세 번째 이야기에 와서야 비교적 내적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작에서 사막을 탈출하고, 더 강한 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던 모습에 비해 색다르고 인간적인 모습이라 흥미롭게 다가왔고 영화의 결이 더 풍부해진 느낌이었죠. 이때, 토니 스타크는 로봇이 없는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 회의합니다. 동시에 <어벤져스>에서 지옥이 된 미국을 경험한 뒤, 심한 불감증에 시달리던 상태죠. 이 문제는 과학 기술이 없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문제로 읽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에게 우리 자신을 둘러싼 외부의 옷(부와 권력 따위)이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외부의 옷을 다 벗어버리고 남아있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수트가 없으면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알렉스에게도 토니 스타크의 고민은 공감을 할 법한 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알렉스에게는 토니 스타크의 고민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죠. 토니 스타크는 수트를 입고 통제하며 능력을 보여 주지만, 알렉스는 ‘로보캅’ 수트를 입는 것이 아니라 로봇 그 자체가 되어 의존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상부의 통제에서 이탈하면 고철 덩어리 속에서 삶의 끝을 기다려야 하고, 때로는 정확한 판단을 위해 기계처럼 사고하며, 이를 위해 그의 뇌는 갈기갈기 뜯겨 수술을 받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인지, 알고리즘의 수식으로 도출된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알렉스는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빼앗기고, 의지라 믿는 것까지 상실하며 시스템에 통제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몰리죠. 자신의 행동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 문제와 함께, 자신은 누구이며 무엇이냐는 철학적 고민까지 하도록 유도하는 무거운 영화입니다. 그는 무엇을 위해서, 어떤 행태로 존재해야 했을까요. 그가 보는 것, 생각하는 것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상황에서, 그의 삶이란 게 누구의 것인지도 묻게 합니다.
영화에서 수트를 입은 알렉스의 모습을 보며 가장 독특했던 점은 ‘오른손’은 인간의 것으로 유지해 뒀다는 점입니다. 사실상 몸의 모든 부분을 절단하고, 기계로 대체했는데 왜 그 손은 남겨 뒀을까요. 기계가 근력이나 정확도, 내구성 면에서 훨씬 더 좋았을 텐데 영화는 그러지 않았죠. 인간의 피부로 이루어진 진짜 손, 반쪽의 그 손을 통해 영화는 말하고 싶었나 봅니다. ‘로보캅’은 몸 대부분이 기계이지만 여전히 인간이다. 그리고 기계에 의존해 시스템의 통제를 받지만, 여전히 인간적 고뇌를 하며 피 흘리는 존재다.
미국의 대자본가 토니 스타크는 미국의 영웅인 동시에 세계를 악으로부터 구해낸 초국적 영웅입니다. 마블이 보여주는 미국은 세계 안보를 위해 '어벤져스'를 결성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정의로운 국가죠. <아이언 맨>에서 중동이 위협적인 국가로 그려지고, 2편에서도 비 미국인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노골적인 설정과 함께, 토니 스타크는 기술의 혁신으로 세계를 구원하는 인물입니다. 그에게 위트 넘치고, 유머러스한 설정을 심어주기 위해 마블이 공들이는 이유 역시 ‘미국’의 이미지와 관련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에 비해 <로보캅>이 바라보는 미국은 그의 수트 만큼이나 냉랭합니다. 기술 장악을 통해 기업의 부를 창출하려는 자본가의 독선적인 모습, 중동국가에 개입하여 로봇이 강압적으로 주민을 압박하는 모습(소년에게 총을 쏘는 로봇은 굉장히 충격적이죠.) 등으로 미국의 정치, 경제, 기술에 무조건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과학 기술의 미래에 대해 <아이언 맨>처럼 낙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죠. 하늘을 날고, 화려한 액션 속에 악을 처벌하는 통쾌한 기술의 모습이 아닌, 인류를 통제하고 감시하는(로보캅에게 입력된 감시 카메라의 정보는 개개인들을 쉽게 감시하고 추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빅브라더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습이 더 두드러 집니다.
그리고 영화 전체엔 로봇 AI에 대한 불안한 시선이 있습니다. <로보캅>에서 보여주는 로봇은 정확한 연산으로 빠른 행동을 취하기는 하지만, 결국 알고리즘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하죠. 이 때문에 영화는 변수 앞에서는 인간만큼 상황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입장을 보입니다. 그래서 기술이 인간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불완전, 불안정한 일이며, 이는 인간을 이롭게 하기보다는 기계를 도입하려는 주체가 세상을 통제하고 억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타국에 기계를 배치하는 미국의 모습에 적용한다면, 새로운 기술은 힘없는 나라를 장악할 힘을 미국에 쥐여 준다고 볼 수 있죠. 즉, 새로운 기술은 미국이 세계를 통제할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보캅>을 만든 브라질 감독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네요.
<로보캅>은 액션만으로 이해되는 영화가 아닙니다. 암울한 미래를 그리는 동시에, 부조리한 정경유착의 현장이 드러나는 씁쓸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카메라는 눈이 영화의 분위기와 가치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 좋은 교과서죠. 해마다 쏟아지는 히어로 영화 속에서, 브라질 감독이 만든 <로보캅>은 미국을 독특하게 바라본, 신선한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읽어 보고 싶었던 영화였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게 했죠. 원작의 변형에서 오는 비판과 함께, 기존 영웅 영화가 주는 쾌감과 흥미를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는 비판까지 이 영화는 대중에게 사랑받지 못할 가능성이 여기저기에 널려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좋은 리메이크이자, 색다른 영웅 영화로 기억될 가치가 있죠.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혹은 미래에 대한 경고로도 읽을 수 있는 묵직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