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과 미장센으로 영화 읽기#001
<양들의 침묵>은 소설 원작의 영화로 조나단 드미 감독이 제작했습니다. 당시 조나단 드미는 B급 영화의 감독으로 알려졌었다고 하죠. 이게 사실이라면, B급으로 분류되는 영화에 대해서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B급 영화를 낮은 퀄리티의 조잡한 영화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조나단 드미의 연출력은 상당히 훌륭했으니까요. B급이 영화 자체의 퀄리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정서, 감정, 이야기를 소재로 택할 때 구분되는 영역은 아닐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도 유년기, 청년기 시절에 봤던 B급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니, 대중문화에서 B급이란 무엇인지 다시 찾아보고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전 방식대로 이 영화를 읽고, 글을 쓴다면 벌레와 나방이라는 모티브와 '변화'에 초점을 맞췄을 것입니다. 거기에 주인공이 여자로서 처한 위치, 그리고 그녀가 시련을 극복하는 점을 말하려 애썼겠죠. 하지만 조금 다른 방법으로 영화를 읽어보려 합니다. 이번엔 영화의 편집과 개별 장면들이 조립된 방법, 그리고 그 장면이 보여주는 정서를 읽어볼 것입니다. 서투른 글이기에 미장센을 분석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편집의 흐름을 완전히 파악했다고 할 수 없는 글이지만, 새로운 글쓰기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 영화를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조디 포스터’, ‘앤서니 홉킨스’ 등의 배우들의 이름입니다. 다음으로는 '하워드 쇼'라는 음악감독의 이름도 보이네요. 그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음악감독으로, 개인적으로 몇 알지 못하는 음악감독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엔, 세 개의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아있네요. 여자로서 남자들 사이에서 훈련받는 스털링(조디 포스터), 갇힌 상황에서도 위압감을 주는 렉터(앤서니 홉킨스), 그리고 스털링과 살인마 버팔로 빌(테드 레인)이 만나는 장면.
<양들의 침묵>의 연출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렉터가 풍기는 분위기입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하고, 나이도 들었으며, 학자 같은 고상한 인상을 주죠. 더구나 그는 갇혀있고, 입을 비롯한 전신이 결박된 상태입니다. (그를 묶고 있는 장비들 덕분에 괴기스러운 느낌이 한층 강화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렉터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그는 뭔가를 일으킬 것만 같은 불안한 느낌을 계속해서 주죠. 앤서니 홉킨스가 이 영화에 출연한 시간은 총 15분이 안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렉터는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고, 6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남우 주연상을 받았죠.
렉터가 어떻게 공포를 전달하고 있는지, 그 연출법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구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그를 인상적으로 보이게 하는 연출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겠죠. 우선 렉터를 만나러 가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스털링이 렉터를 만나러 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철창을 넘어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갑니다. 마치 악마의 소굴로 내려가는 듯하죠. 그리고 지하의 가장 안쪽에 있는 렉터는 여유롭고 품격있는 모습으로 스털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와 대화를 해보면 음침하고 괴기한 살인자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는 노신사의 모습에 가깝죠. 감옥과 철창이라는 공간의 괴기스러움, 조명, 고요한 공간을 관통하는 쇳소리, 음침한 공간과 어긋나는 우아한 클래식 음악 등 많은 것들이 어딘가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불편함의 중심에는 앤서니 홉킨스의 연기가 있었죠.
이번에는 카메라에 관해 이야기해 보죠. 이 영화 속 카메라는 시작부터 스털링이 여성으로서 차별받는 모습을 두드러지게 보여줍니다. 오프닝 씬부터 그녀는 (다른 인원들과 동떨어져) 혼자서 뛰고, 훈련하고 있죠. 그녀는 경찰 구성원이지만 조직에서 일종의 압박을 느끼고 있습니다. 좁은 엘리베이터 장면에서는 그 압박에 대해 더 잘 볼 수 있죠.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스털링이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장면에서는 많은 것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성인 스털링의 왜소한 육체를 보여주는 동시에 조직에서 소수자, 약자라는 느낌까지 강렬히 전달하죠. (후에 스털링이 보안관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이와 유사한 느낌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그녀는 경찰임에도 타 구성원들에게 불청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죠) 이러한 그녀의 위치는 남자들의 눈을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담은 것, 남자들과는 차별된 복장과 현저히 작은 체격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녀가 성적인 대상으로 취급받는 장면 등에서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러한 대조적 배치는 주인공이 여자로서 가지는 핸디캡을 극대화한 것이죠. 그 덕분에 <양들의 침묵>의 스털링은 불리한 위치 속에서 시련을 극복하는 여성으로 보입니다.
카메라의 시점도 재미있습니다. 클로즈업이 많은 <양들의 침묵>은 인물의 표정으로 긴장감을 전달하는데 뛰어납니다. 인물의 머리와 턱이 조금 잘려나가면서도 가까이 다가가는 구도는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긴장감을 맛보게 하죠. 그리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클로즈업 샷도 특이합니다. 이 샷은 극영화에서 잘 쓰이지 않는데, <양들의 침묵>은 이를 활용해 인물이 관객에게 직접 말을 하는 것 같은 효과를 줌으로써 이야기에 강렬히 몰입하게 하죠. 이런 극단적인 클로즈업, 정면 응시를 외에도 1인칭 시점의 주관적인 샷도 곳곳에 배치해 뒀습니다. 가령, 새로운 공간에 가서 단서를 찾으려는 스털링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그녀의 시점으로 공간을 담는 장면이 꽤 있죠. 매우 자연스럽게 컷이 전환되어 이질감이 없는 이 샷을 통해 미지의 공간과 사건의 단서를 관객이 직접 보게 합니다. 덕분에 관객이 미스터리의 중심에 서서, 함께 수수께끼를 푸는 느낌을 주죠.
그 외에도 표정으로 분위기를 전달하는 장면이 더 있습니다. 렉터를 만나러 가기 직전에 의사가 사진을 주며 그가 저지른 엽기적 행위를 설명할 때, 카메라는 그 사진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 스털링이 질려있는 표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물에서 건진 시체를 보여줄 때도 참혹한 시체를 보여주는 것 대신, 대사로 잔혹함을 말하고, 이에 반응하는 스털링을 카메라는 담죠. 심의 때문에 잘려나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직접 보여주는 것보다 이렇게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범인의 괴기스러움과 그에 대한 호기심을 더 자극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편집’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을 말해보려 합니다. 스털링과 경찰이 범인을 만나러 가는 영화의 후반부는 교차편집이 구현할 수 있는 재미있는 트릭을 보여주죠. 경찰이 버팔로 빌의 집을 습격하는 듯했지만, 버팔로 빌이 문을 열면 엉뚱하게도 스털링이 서 있습니다. 버팔로 빌과 경찰의 대면이 기대되어 고조되던 긴장감은 이 반전을 통해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죠.
스털링과 버팔로 빌의 만남은 이전 장면의 경찰의 작전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을 형성합니다. 관객은 범인인 버팔로 빌의 존재를 알고, 스털링은 그가 범인인 것을 모르죠. 이때, 관객은 스털링에게 닥칠 위험을 염려할 것입니다. 극 중 인물(스털링)보다 관객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지는 이 ‘아이러니’ 덕분에 스털링은 더 약하고, 위험에 놓인 것처럼 보이죠. 관객이 버팔로 빌의 총을 보게 되면 이 긴장감은 더 증폭됩니다.
그런데 스털링이 나방을 통해 범인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 이 긴장감의 국면은 또 한 번 전환된다. 버팔로 빌이 도망치고 스털링이 그를 쫓으면서 스털링과 관객은 똑같은 입장에 섭니다. (그녀가 아는 만큼 관객도 알고 있죠) 덕분에 범인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서 생기는 긴장감이 형성됩니다. (이런 종류의 긴장감을 '서스펜스'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스털링이 문을 하나씩 열면서 숨겨진 공간들이 보일 때, 카메라가 보여주지 않는 곳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긴장감이 계속해서 고조됩니다. 그러다가 스털링이 욕조에서 썩어가는 시체를 발견하고 기겁하는 순간 마지막 반전이 일어나죠. 암전되는 동시에 카메라의 시점이 전환되는 것입니다. 앞서 자주 등장한 1인칭 시점으로의 변화인데, 이번에는 스털링의 시점이 아니라 버팔로 빌의 시점입니다! 이 시점은 다시 서스펜스에서 아이러니로 관객의 위치를 변화시키며, 영화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내죠. 다양한 종류의 긴장감을 형성하는 장면이 배치된 현란한 이 후반부가 <양들의 침묵>의 백미라 생각합니다.
영화는 스털링이 자신의 뒤에 있는 버팔로 빌을 쏘면서 끝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장면은 극 중에서 스털링이 훈련을 받을 때 이미 한 번 겪었던 상황이었다는 거죠. 훈련 중 그녀는 뒤를 확인하지 못해 미션에 실패하고서 ‘뒤를 조심하자’라는 교훈을 얻었었는데, 아마도 이 마지막 상황을 위해 그 장면을 자연스럽게 배치해두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의 주제로 묶이지 않은 글쓰기이기에 굉장히 거칠었습니다. 장면들을 보며 생각할 수 있던 모든 영화적 생각들을 제 마음대로 펼쳐놓은 것 같네요. 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연출 및 편집을 공부하기 위해 써본 글이 바탕이기에 더 파편적인 글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모처럼 자유롭고 재미있게 영화를 뜯어 본 시간이었다 생각하며, 이번 글쓰기를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