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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025 트로이

신이 없는 인간만의 [일리아스]


신과 인간

‘신은 인간을 질투한다’ 아킬레스(브래드 피트)는 죽음이 나쁜 것이 아니라 멋진 것이라 말합니다. 매 순간을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줄 매개체가 죽음이고, 이 덕분에 인간의 삶은 열정으로 넘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도 그는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었고, 그 이름만은 삶의 유한성을 벗어나(인간을 초월해) 불멸성을 얻길 원하는 이중적인 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신’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죠. 아킬레스는 먼저 살았던 열정적인 ‘인간’으로서 불멸의 가치를 얻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에게 신은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 방관하는 자연과도 같은 존재에 불과하죠. 이렇게 <트로이>는 철저히 인간의 주체성을 믿고, 아킬레스만의 방식으로 불멸을 얻고자 했던 이야기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재구성합니다.

더불어 이 영화는 트로이의 패인도 신에게 기대고자 했던 나약함으로 표현합니다. 헥토르(에릭 바나)만이 신에 기대지 않고 트로이를 구원할 방법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사제와 프리아모스 왕(피터 오툴)은 그를 무시하고 아폴론의 메시지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죠. 결국, 트로이는 그들이 믿었던 신 덕분에 아킬레스의 화를 불렀고, 목마는 그들의 성벽을 무혈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신에 의지한 트로이와 인간 그 자신을 믿은 아킬레스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결국 아킬레스였던 것이죠. 더불어 <트로이>는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는(혹은 그들이 싸우는 이유)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사랑’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우리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고귀한 위치로 올려 주려 애썼는데, 이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신들의 전쟁으로 묘사된 것에 비해 굉장히 적극적인 해석, 혹은 인간적인 해석입니다.

신화의 영웅에서 인간으로

불사의 신화적 영웅이 아닌 삶과 죽음에 고민하고, 자신의 행위(살인)에 이질감마저 느끼는 인간적 영웅으로서 아킬레스는 관객이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비극적 인물입니다. 처음엔 명예를 위해 미친 듯 싸우는 전투 병기였다가, 사촌에 대한 복수를 위해 결투를 신청하는 전사로, 끝에는 사랑하는 브리세이스(로즈 번)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 뛰어드는 로맨티스트로 아킬레스는 점차 변해가죠.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아킬레스 스스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지닌 인간적 모습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최후에는 육체적 고통과 함께 죽음 앞에서 결국 무기력함을 느끼면서 인간의 삶을 완성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그를 신화적 영웅에서 인간 중의 한 명으로 격하시키더니, 다시 인간 중의 최고로서 그의 자리를 새로 마련해 뒀습니다. 불사의 용맹스런 신의 아들에서, 고뇌하며 용기를 잃지 않는 아킬레스의 모습은 신화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죠. 그래서 <트로이>는 일리아스의 흥미로운, 훌륭한 재현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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