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복근도 결국엔, 해가 뜨는 동방의 제국 앞에서는 녹아내립니다. 하지만 패장인 레오디나스는 최후에 ‘승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죠. 그는 무엇의 승리를 말하고 싶었을까요. <300>의 속편 <제국의 부활>은 그 승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국의 부활>은 전작처럼 그리스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신념 아래, 침략자이자 잔혹함이 흘러넘치는 페르시아에 승리를 거둬야 한다는 골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작이 협곡에서의 몸과 몸이 부딪히는 전투였던 것에 비해, 이번엔 함대와 함대가 맞붙어 스케일이 확장되었죠. 그리고 국가 간의 문제로 보였던 전작과는 달리 개인적 사연과 복수가 전쟁의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도 새롭습니다. 덕분에 <제국의 부활>은 해상전이라는 스펙터클을 흥미롭게 구현하는 데 성공했고, 이와 함께 에바 그린이 연기한 아르테미시아라는 관능적이고 힘이 넘치는 여성 인물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영화죠. 하지만 <300>은 전작에서 문제가 되었던 페르시아를 향한 편견도 속편에 그대로 남겨둬 버리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더불어 이 영화는 전작과 같은 질감, CG에 여전히 기대고 있는데, 이점은 ‘영화’라는 개념에 많은 혼란을 던지는 부분이기도 하죠.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들 덕분에 <제국의 부활>은 서구가 그들의 우월함을 전시한, 혹은 남용한 영화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우선 <제국의 부활>이 걸치고 있는 옷에 대해 먼저 생각해봐야 하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CG의 문제를 걸고넘어지게 됩니다. 유독 <300> 시리즈의 CG에 이질감을 느끼게 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영화라는 매체가 지켜오던 어떤 중요한 자리를 내어준 상실감이 가장 문제인듯하네요. 처음 <300>의 영상을 접한다면 기존의 영화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과하다는 느낌이 확실히 풍기던 영상이었죠. 어디서 어떻게 촬영해서 보정을 하면 저렇게 짙고 우울한 느낌의 독특한 배경을 구할 수 있었을까.
이 궁금증은 훗날, 대학에서 수강한 포토샵 수업을 통해 해결되었는데 ‘크로마키’를 이용한 CG 배경이 그 해답이었습니다. 이 촬영과정은 그 당시엔 놀랍고 신기했는데, (인물만 서 있고 그 뒤엔 초록색 배경의 스크린밖에 없는 촬영 장면을 상상해 보셨나요. 벌거벗은 것 같은 그 허전한 영상을 보고 있으면, 그 환경에서 감정을 잡을 수 있는 배우의 능력이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CG 덕분에 표현이 더 풍부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습니다. 이후 시간은 흘렀고, 실제로 영화는 CG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면서 성장해왔죠. 이제는 오히려 CG 없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물어봐야 할 시대까지 와버린 것 같습니다.
이번에 <제국의 부활>의 CG를 보며 떠오른 것은, 그 어떤 영화도 아닌 컴퓨터 혹은 비디오 게임들이었습니다. 게임의 그래픽이 우월할 때, 종종 ‘영화네 영화!’ 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번엔 역으로 영화를 보면서는 ‘게임 같다’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죠. 특유의 CG 배경 때문만은 아닙니다. 영화의 자유롭고 역동적인 카메라 워킹과 감독의 연출(슬로우 모션과 자유로운 줌의 활용) 등은 게임 속의 장면과 닮았죠. 이제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영화의 스펙터클을 자유로운 구현할 수 있게 했고, 카메라를 사람의 손에서 해방해줌으로써 이전엔 촬영할 수 없는 장면과 정서를 담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이 자유는 창의적인 표현들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환영할만한 일이겠지만, 이상하게도 뒷맛이 찝찝한 게 개운하지 못하네요. 영화와 게임의 경계가 무너져가고 있다는 점은 과연 어떤 미래를 보여주게 될까요.
스크린 이미지는 실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허구였습니다. 하지만 <300> 시리즈가 CG로 배경과 이미지를 만드는 것과는 달리 기존의 영화는 현실의 질료를 카메라에 담아 스크린에 옮기고자 했죠. 이 차이가 후에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지 모르겠으나, 좋아해왔던 ‘영화’가 무너진 느낌이었고, 촬영이라는 영화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당한 것 같아 씁쓸함이 한가득 엄습해옵니다. 이 차이는 대체 뭘까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가올 수 있는 미래에 대해 생각해볼까요. 이렇게 테크놀로지가 발달한다면, 언젠가 우리는 정교하게 디자인된 CG 배우에게 열광하며 영화를 관람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연기 못하는 아이돌을 스크린에 등장시키는 것보다, 연기 잘하는 사이버 배우가 영상의 완성도를 더 높여 주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때 우리는 무엇을 보고 열광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제국의 부활>을 통해서 보건대, 이미 영화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CG에 넘겨줘 버린 것 같습니다. <아바타>가 노골적이었다면, <300> 시리즈는 은밀하게 테크놀로지가 영화를 장악했죠. 그리고 이는 더 위험해 보입니다. 후에 더 현실 같은 CG가 스크린을 장악할 것이고, 관객은 CG라는 인식을 크게 하지 않고 영화를 보게 될 수도 있죠. 물론, 표현의 무한한 확장을 반기며 새로운 스펙터클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상을 정말 영화로 봐야 할까요. 그런 시대가 온다면, 사진 혹은 영화를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감히 예상하자면, 테크놀로지의 빠른 발달은 가상의 이미지를 실제로 인식한다는 ‘시뮬라시옹’ 그 이상의 개념이 필요할 것입니다.
<제국의 부활>은 그리스 남자들이 식스팩 초콜릿 복근, 그리고 화려한 CG라는 옷을 벗겨도 여전히 어떤 우월함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전작처럼 이 영화는 서구 중심의 역사적 재현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300>에서 괴물처럼 표현된, 동방의 페르시아인들 덕분에 그리스인들의 전쟁은 더 정의롭고, 그들의 자유는 반드시 쟁취해야만 하는 가치로 묘사되었죠. 이 때문에 <300>은 개봉 당시에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난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이 영향 때문인지 후속편에서는 여러 부분을 신경 쓴 듯했는데, 우선 크세르크세스에게도 싸워야 할 동기를 유발하고, 그의 행동을 하죠. 그리스는 자유를 위해서, 스파르타는 죽은 왕의 복수를 위해서, 그리고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와 아르테미시아는 선왕의 복수를 위해서, 이제는 모두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바다에 모인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이 정당성이 플롯에 왜 중요한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관객의 몰입과 공감이라는 정서에 영향을 끼치기에 중요하죠. 관객은 누구의 편에 서서 영화를 볼 것인가. 전작과 달리 이번엔 영화 속 힘의 균형을 얼추 맞춰뒀고, 덕분에 관객에게 동방의 편에서 영화를 볼 기회를 줍니다. 전작에서 다소 우스워 보였던 크세르크세스는(나는 관대하다!) <제국의 부활>에서 전쟁에서 이겨야 할 동기가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는 거만한 전쟁광이 아니었죠) 그리고 크세르크세스가 페르시아의 군중을 내려다보는 부감 샷 등을 통해 카리스마까지 획득하죠. 더불어 그와 함께 전장을 누비는 아르테미시아는 이 영화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다소 잔인한 그녀의 행동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이 역시 그녀가 유년기에 겪은 그리스에 대한 분노에서 온 것임을 보여주며 관객이 이해할 여지를 남겨두죠. 이 두 가지 정도만 봐도 전작보다 페르시아에 정당성과 매력을 쥐여주기 위해 신경을 썼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이 영화는 여전히 서구를 미화시키는, '승자의 역사'라는 관점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역시 두 개의 장면을 통해 말해보려 합니다. 하나는 아르테미시아라는 캐릭터에 있죠. 그녀의 카리스마와 매력은 엄청났지만, 전략이 뛰어나다는 설명과는 달리 전투에서 무능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그녀가 고심해서 선택한 전략은 테미스토클래스(설리반 스탭플턴)를 몸으로 유혹시키려는 방법이 전부였죠. ‘에바 그린’의 몸을 응시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상업적 속셈과 함께, 그녀의 캐릭터와 페르시아라는 나라의 한계를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전략은 없고 이성적이지 못하면서 분노에 휩싸여 있고, 결국엔 욕망에 기대는 여성 아르테미시아. 응시의 대상이 된 여성 에바 그린에게 페르시아의 지휘관이라는 설정까지 더해지면, 두 사람의 전투적인 정사 장면이 굉장히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또 하나는 노를 젓는 각 진영의 모습을 대조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채찍으로 때려서 노예들이 움직이게 하는 페르시아와 자발적으로 노를 젓는 그리스인의 직접적 대조를 볼 수 있죠. 이 장면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리스 역시 그 당시엔 평등한 사회가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노 젓는 장면만 본다면, 역사에는 그리스의 ‘하층민’들이 노를 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노예가 아닌 이들이 노를 저었다고 할지라도 페르시아 노예들 다음에 이 장면이 붙음으로써 야만 대 자유라는 프레임이 형성됩니다. 그리스의 좋은 면만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명확해 보이죠)
영화는 그리스 시민들의 토론하는 장면 등을 통해 그리스가 민주주의와 자유를 중시하는 사회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들 역시 계급이 있던 모순적인 사회였습니다. (영화에서 스파르타인이 아테네인에게 호모라고 부르는 것은 유머를 위해 넣었겠지만, 그 당시 아테네는 시민, 즉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게 남자였기 때문에 동성연애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계급적 텍스트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영화는 이를 감추고, 페르시아와의 대조되는 장면 배치, 편집을 통해 그리스의 역사(서구의 역사)를 미화합니다. 거시적 역사, 승자의 기록으로서 역사관을 볼 수 있게 하는 이 대목에서는 미국의 모순적인 과거사를 다룬 <노예 12년>이 떠오르기도 하죠. 장르와 메시지는 다르지만, 역사를 서술하는 관점을 비교할 때, <300> 시리즈의 가장 뚜렷한 비교 대상은 <노예 12년>일 수도 있습니다.
<제국의 부활>의 결말처럼 테미스토클레스는 승리를 거뒀고,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살라미스 해전’은 세계 4대 해전 중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는 엄청난 전투입니다. 여기서부터 영화의 관점은 정해졌는지도 모르겠네요. 이미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을 역사적 기록의 재현이니까요. 영화는 글이 아닌 이미지로서 역사적 기록을 다양하게 변형시켜 허구적 산물로 만들 수 있고, 승자들이 그냥 넘겼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가능성이 있는 매체입니다. 앞서 언급한 <노예 12년>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들추기 싫었던 추악한 과거이며, 승자가 서술한 역사에서 간과되기 쉬웠던 개인의 역사이자, 그 시대를 살았던 누군가의 역사를 재현한 좋은 예입니다.
그렇다면 과거 살라미스 해전을 바탕으로 만든 <제국의 부활>은 역사적 텍스트로서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요. 강요된 역사 외에, 그리고 편견이 반영되지 않은 동양의 모습을 표현할 수는 없었을까요. <300> 시리즈를 동양에서 만들었다면, 혹은 영화 산업의 중심이 할리우드가 아닌 동양에 있었다면, 영화의 분위기와 메시지는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화는 역사이면서 감정을 자극하는(앞서 이야기된 정당성과 감정 이입 등)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무의식에 영향을 끼치고, 어떤 관점을 형성하게 하죠. 그래서 이 영화가 교묘히 보여주는 오리엔탈리즘은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페르시아는 왜 물을 건너가면서까지 그리스를 침공하려 했을까요? 원래 아테네는 페르시아에 사신을 보내 흙과 물의 조공을 바치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이오니아라는 지방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아테네가 반란군을 보내 페르시아 사령부를 불태우고 성소를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죠. 그 때문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아테네를 응징하기 위해 출정을 했다고 합니다. 이래도 아테네만 정의로울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