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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기#027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

스케일의 확장에 역행하는 이야기

국내에 개봉하는 마블의 영화는 대부분 큰 흥행에 성공했고, 올해 개봉한 <어벤져스2>가 서울에서 촬영될 정도로 팬들의 관심이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마블 시리즈 중 <퍼스트 어벤져> 만큼은 국내에서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죠. 2011년 당시 51만 명이라는 관객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습니다. 이는 아이언 맨 시리즈가 첫 편부터 400만을 기록한 것에 비해 무척 비교되는 수치이며, ‘어벤져스’ 식구 중에서도 최하위의 성적이죠.


<퍼스트 어벤져>의 부진

<퍼스트 어벤져>는 미국의 20세기 전쟁사와 닿아있는 스토리로, 미국 밖의 관객에겐 감흥을 주기엔 부족했었고, (혹은 새롭지 못했거나) <아이언 맨>과 <토르> 등의 시리즈에 비해 액션의 화려함도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아이언 맨이나 토르는 첨단 기술과 신의 능력을 이용해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액션을 보여줬지만, 캡틴 아메리카(이하 캡틴)는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액션을 보여주는 한계도 있었죠. 거기에다 전작의 캡틴(크리스 에반스)은 너무 정의롭고 진지해서 기존의 마블의 캐릭터가 지닌 유머러스한 매력조차 부족했습니다. 그 외에 <아이언 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기네스 펠트로, <토르>의 크리스 햄스워드-톰히들스턴-나탈리 포트만이라는 배우들에 비해 대중적인 스타가 부재했다는 점도 흥행 부진의 이유로 꼽을 수 있겠네요.


캡틴이 마블의 영웅으로 살아남는 법

마블은 <어벤져스>의 이야기를 계속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워뒀기에 캡틴을 이대로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윈터 솔저>를 기존에 흥행한 마블의 영화들처럼 만들기 위해 노력한듯하죠. 우선 섹시 스타 스칼렛 요한슨이 캡틴을 구원하기 위해 영화에 참가했습니다. 그녀는 액션에서의 볼거리뿐만 아니라, 캡틴의 감정 폭을 넓혀줄 수 있는 매력적인 상대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죠. 몸에 달라붙는 검은 수트를 입은 그녀는 이야기의 전개에 흥미를 더할 수 있는 캐릭터이자, 상업적으로 뛰어난 응시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윈터 솔저>는 전작에서 보여준 단순한 액션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화를 시도하는데, 이 중심에는 팔콘(앤서니 마키)이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있습니다. 팔콘은 정의감 넘치는 캡틴의 친구인데, 그에겐 하늘을 날 수 있는 장비가 있죠. 이 특별한 능력 덕분에 캡틴과 카메라는 땅에서 해방되어 공중에서 전투를 펼칠 수 있게 됩니다. 더 넓은 공간에서, 더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액션이 가능하게 된 것이죠.


이 외에도 캐릭터 간의 충돌로 만들어지는 유머러스한 상황과 더 강력한 적의 등장이 영화를 전작보다 더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윈터솔저>는 전작과 비교해 모든 영역에서 스케일의 확장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더 많은 캐릭터, 더 강력한 적, 더 넓어진 전장, 더 성장한 영웅 등.... 사실, 마블의 이야기는 단조로운 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몇 없는 변주 중의 하나가 스케일의 확장이라 생각했는데, <윈터 솔저>도 이를 시도한 것이죠. 그런데 딱 한 가지 역행하는 부분이 <윈터 솔저>에 있습니다. 확장을 추구하는 이 시리즈에 홀로 역행하는 요소는 바로 시간(혹은 이데올로기)입니다.


마블의 배신?

영화의 시작부터 닉 퓨리(사무엘 L. 잭슨)가 비밀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나타샤 역시 은밀한 행동을 취할 때 캡틴은 자신이 믿고 있던 조직을 의심합니다. 그의 불신은 조직 내부에서 적을 찾게 하죠. 이때 캡틴이 겪는 신뢰에 대한 내적 갈등은 마블 영화치고는 신선하게 요소입니다. 혹시, 이것이 미국 정치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려는 시도였다면, 마블의 히어로 영화 중엔 무척 독특한 위치에 섰다고 할 수 있죠. 늘 미국에 우호적인 영화들을 생산하던 제작사 마블을 생각했던 관객에게 유쾌한 배신감(?)마저 느끼게 할 정도입니다. 마블이 전 세계적 영향력을 확보하더니 현실의 정치사회 문제를 영화 속에 반영하고, 그들의 비판적 태도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묵직한 제작사로 변한 것일까요. 단순한 오락 영화를 넘어, 미국 자본을 넘어 마블이 그들만의 색깔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윈터 솔저>는 한 단계 진화한 엔터테이먼트 기업으로서 마블을 바라보게 합니다.


마블의 가능성 [마블 국가로의 초대]

<아이언 맨>은 시리즈가 나아갈수록 토니 스타크의 내면에 고민하고, 이를 보편적 인간의 문제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는 정치사회의 영역으로 이야기를 확장했죠. 이렇게 마블이 그들의 고민과 메시지를 영화에 삽입하고 있다는 점은 마블의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이 가능성은 '마블'하면 떠오르던 단순한 오락거리로서의 영화를 벗어나, 그들만의 새로운 영역을 건설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오는 것이죠.


마블의 영화는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으며, 그들에게 미국이라는 국경은 이제 중요하지 않은듯합니다. 그들은 새롭게 ‘마블’이라는 국경을 만들 수 있고, 그들의 사상과 가치관을 영화를 통해 국경 안으로 제공할 통로도 가지고 있죠. 온몸의 조직이 뇌에 이어져 있듯, 전 세계에 분포한 시민들은 마블의 영화로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블 국가 시민으로의 초대]. 초국적 기업의 힘이 강해진 세계화 시대에는 국가 경계가 모호해지고 기업이 새로운 국가가 될 것이라더니, 마블의 행보 역시 그 추세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는 앞서 변주로 말한 스케일의 확장이 영화를 뚫고 확장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다양한 문제까지도 함께 끌고 올 수도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자리를 ‘마블’이 대체한다고 무작정 좋아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요.


유일한 스케일의 역행

하지만 이 거대한 상상은 <퍼스트 어벤져>에 두고 왔던 적대자 ‘히드라’가 다시 소환되는 순간 한 번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앞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마블은 기껏해야 미국의 색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헐리우드의 오락영화에 불과했던 거죠. 마블의 가상 국가 건설이라는 상상으로까지 나아갈 필요가 없고, 심각해질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여전히 미국의 가치관을 무의식에 심을 수 있다는 점에서 관객은 촉각을 세워야 하죠. <윈터 솔저>는 전작처럼 미국 헤게모니 아래에서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정렬하고 있습니다.


히드라는 캡틴이 과거에 겪은 2차 세계 대전의 악몽입니다. 캡틴의 유래, 그리고 그의 애국심을 상기시켜주기 위한 요소로서 배경에 있는 히드라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이 설정은 나치의 역사가 판타지가 되어 오락 영화의 영역에 통합되는, 흥미로운 재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엔터테이먼트의 뛰어난 전략이었다고 통 크게 인정할 수 있죠) 하지만 <윈터 솔저>에 재등장한 히드라는 불편했습니다. 마블은 나치의 잔상, 냉전의 망령을 21세기까지 끌고 와서 숨 쉬게 하고 있죠. 나치와 히틀러의 사상으로 빚어진 괴물은 미국의 국경을 초월해 국제 세계를 위협하며 울부짖습니다. 아직 냉전은 끝나지 않았고, 어벤져스가 필요했듯 그 시절 한 축을 담당했던 미국이 여전히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말이죠.


<윈터 솔저>는 묵은 냉전 코드를 불러와 현재에 대입하고, 미국의 영웅에게 정당성을(싸울 이유 혹은 의무) 줍니다. 이 영화를 보게 될 관객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히드라로 표현된 반미국적 세력에 대한 적대감? 동유럽에 대한 불신? 한때 유행한 미 중심 이데올로기의 내재화? 더는 지구에서 적대자로 찾을만한 강력한 괴물이 없어, 미지의 영역으로 확장하던 마블(<어번져스>, <토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등)이 왜 지나간 냉전의 구조 속에 그들의 이야기를 봉합하려고 했는지 의문입니다. 나치가 그토록 강력하고 매력적인 소재였을까요. 왜 구소련을 재차 언급하며 과거의 감정 구조를 현대의 관객에게 씌우려 할까요. 그냥 오락영화로 넘겨도 상관없지만, 이 부분만은 마블이 보여주던 스케일의 확장에 역행하는 요소로 눈에 상당히 거슬립니다.


너무도 재미있는 마블의 영화

쉴드의 해체 이후 영웅들은 미국 사회에 흡수, 그 구조 속에 재편됩니다. 이들은 미국의 정의 구현을 위해 애쓸 것이고, 덕분에 미국의 안보는 더 탄탄해질 것이라는 희망적인 분위기 속에 영화는 끝나죠. 미국의 승리였고, 행복한 결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미국에 대한 우호적인 가치관은 해마다 더 많은 관객에게 주입될 것입니다. 그리고 범람하는 마블 시리즈의 홍수 속에서, 자발적으로 관객이 미국에 거리를 두고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힘들어지겠죠. 영화의 포장을 뜯고, 미국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를 기대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영화를 보며 마음 한구석이 무겁고 찝찝했습니다. 그런데도 영화관을 나서며 스친 생각은 이뿐이었습니다. <윈터 솔저>는 ‘정말 재미있는 히어로 영화다!’. 두렵게도 마블 영화는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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