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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기#035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알레한드로 이랴니투와 엠마누엘 루베즈키는 자연의 풍광을 카메라 프레임 안에 이식하려 했고, 그 중심에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 있었다. 그리고 이 원주민이 <레버넌트>의 초점이며, 감독의 메시지가 담긴 대상이라 생각한다.(최근에 있었던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수상소감에 원주민 이야기를 했다. 그 역시 이 영화의 초점이 한 인간의 생존을 넘어, 미국의 역사와 원주민의 시간을 소환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인간이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이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모피 사냥꾼들이 그 땅의 원래 주인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레버넌트>는 삶의 터전, 그들의 땅, 자연을 잃은 인디언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는 서부극의 적대자, 악인이 아닌, 약탈당한 피해자들의 위치에 인디언을 소환한 뒤, 그 시대를 다시 읽어보라 한다.


<레버넌트>는 두 개의 서사가 진행되는 영화다. 영화엔 아들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피츠를 쫓는 글래스의 이야기와, 딸을 잃은 부족장이 그녀를 찾기 위해 이동하는 여정이 겹쳐져있다. 두 사람은 모두 가족을 잃었고, 한 사람은 가족을 찾기 위해, 한 사람은 복수를 위해 먼 길을 가고 있다. 이 유사한 위치의 설정은 글래스를 인디언의 시점에 서게 하며, 동시에 관객을 인디언의 입장에 이입할 수 있게 한다. 감독이 자연을 담은 것에는 인디언의 공간을 보여주고, 그들의 잃어버린 삶을 엿보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는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그들의 정서와 공명해보라는 것이다.


이 영화엔 어떤 법칙 같은 것이 있다. 등가교환의 법칙 같은 것인데,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면, 그와 유사한 행동이 반작용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역으로 받은 만큼 돌려주기도 한다. 머리 가죽이 잘려나간 피츠는 헨리 대위의 머리 가죽을 벗긴다. 가죽 사냥을던 헨리 대위는 그의 가죽이 뜯겨 나갔다. 성적으로 유린당한 포와카는, 그 남자의 성기를 자른다. 이러한 등가교환이 더 잘 보이는 장면은 피츠와 글래스의 마지막 대결이다. 도끼로 피츠의 손을 내려친 글래스는 피츠의 칼에 손이 뚫린다. 글래스의 귀를 물어뜯은 피츠는 뒤에 인디언에게 귀가 잘려나간다.


영화 전체로 확장해도 이 법칙은 유효하다. 우선 원주민의 영토를 침범해 자연을 훼손한 자들은 인디언에게 죽어 나간다. 그리고 글래스의 아들을 죽인 피츠는 죽임을 당했다. 끝으로 포와카를 구해준 글래스는 아키카라 족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그녀를 살려준 대가로 글래스는 삶을 보장받은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는 원주민, 개척자를 가리지 않는, 영화 내의 물리법칙이다. <레버넌트>의 등가교환의 법칙을 역사 속의 원주민들에게 적용하면 어떨까. 개척자들은 그들의 삶을 부쉈고, 그들의 터전을 망가뜨렸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리고 삶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그들은 개척자들과 싸웠다. 이렇게 원주민의 처지를, 그들의 시선에서 바라보게 하는 힘이 <레버넌트>의 카메라엔 다.


역사에 대한 물음

영화의 도입부, 글래스의 과거 장면이 끝나면 카메라는 흐르는 물을 따라간다. 흐르는 물을 잡으려 노력하는 카메라는 떠내려가는 무언가를 잡고 있었다. 혹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움직임처럼 보이기도 했다. 흐르는 물의 이미지에서 이를 연상한 것은, 이 영화가 과거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를 붙잡고, 질문을 던지는 영화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서부극에서 수도 없이 등장했던 야만인으로서의 원주민은 <레버넌트>에 없다. 그들은 손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행동한다. 이런 시선은 과거 미국 주류문화, 서부극에서 원주민을 약탈자, ‘가해자’로 풀어낸 것과 확연히 다르다. 영화는 미국의 역사에 관해 묻는다.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가. 왜 인디언들은 그렇게 행동해야 했나.


‘죽음에서 돌아온 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영화에서 돌아온 자는 누구였을까. 회색곰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죽어가던 글래스였을까. 흙 속에 묻히는 장면에서 글래스는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다. 이후로도 극한의 고통을 견디며 죽음과 밀당하는 글래스에게 ‘죽음에서 돌아온 자’라는 칭호는 제법 잘 어울린다. 그런데 이 칭호가 또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부족장의 딸 포와카. 그녀는 죽음 직전까지 갔지만, 글래스가 구조해줬고, 부족이자 자연의 품으로 돌아온다.

앞서 부족장과 글래스 두 사람의 서사가 진행된다고 했다. 이 서사에서 두 사람은 모두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웃을 수 있는 것은 부족장이지 글래스가 아니다. 부족장은 잃었던 딸이 돌아왔고, 모피 사냥꾼에게 복수도 한다. 글래스는 복수를 간접적으로 이루고, 살아남지만 그의 아들은 여전히 죽어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이미 건넌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포와카에게 더 적절하며, 글래스는 혹독한 고난을 이겨냈지만, 복수를 위해 죽음을 쫓는 자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부족장은 딸을 구하고, 집으로 돌아가며 그의 서사를 완성한다. 닫힌 서사다. 하지만 글래스는 쫓던 상대가 사라졌고, 숲에서 방황하며 영화는 끝난다. 그의 미래는 불투명한 채, 열린 서사로 영화는 끝난다. 이렇게 글래스가 겪은 삶이 개척시대를 거친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가 아닐까. 개척을 위해 파괴한 땅, 그 땅과 원주민을 적대자로 만들고, 그 적대자에게 가족을 잃고, 또 복수하고, 또 무엇인가를 잃고…. 이 기괴한 나선 위에 아메리카의 역사는 세워진 게 아닐까. 그래서 늘 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쫓는 광기에 빠져야만 지속할 수 있는 역사를 만든 것이 아닐까. <제로 다크 서티>,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마야와 크리스 카일이 겪었던 방황은 그 옛날 글래스가 먼저 겪었던 것이 아닐까. <레버넌트>가 다시 묻는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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