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가 향하고 있던 곳
영화관에 밥 먹듯 출석도장을 찍은 이후, 스크린을 통해 경험했던 가장 긴 롱테이크는 <그래비티>의 첫 장면이다. 20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컷이 한 번도 없던 그 장면은 생경하면서 놀라운 체험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체험’이란 단어로 저장된 <그래비티>. 그때부터였다. 엠마누엘 루베즈키라는 촬영감독의 폴더를 머리 안에 새로 만든 것이.
많은 이들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상을 받기를 바라나 보다. <길버트 그레이프>, <에비에이터>, 그리고 최근에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까지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연기의 신은 다른 배우의 얼굴을 하고 스크린에 얼굴을 비췄다. 어느 때보다 수상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되는 올해, 그는 한을 풀 수 있을까.
하지만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전설’로 기록될 가능성이 있는 남자는 따로 있다. ‘엠마누엘 루베즈키’. 발음하기조차 까다로운 그의 이름이 낯설다면, 그가 촬영한 영화는 어떨까. 촬영 감독인 그는 2014년 <그래비티>, 2015년 <버드맨>, 그리고 올해에는 <레베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3년 연속 촬영상에 도전하고 있다. 그의 존재 덕분에 <레버넌트>는 ‘카메라’에 대해 더 집요하게 묻게 한다. 알레한드로 이랴니투 감독이 말한 세 가지 원칙(시간의 흐름대로, 인공광을 사용하지 않고, 롱샷으로 연출할 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레버넌트>, 이 영화는 촬영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했다.
<레버넌트>의 연출자와 감독은 <버드맨>을 함께 작업했다. 이를 기억하고 있다면, <버드맨>의 잔상이 관람자에게 쉽게 떠날 리 없다. 그리고 그 잔상이 남아있다면, <레버넌트>의 부드럽고 흐름을 깨지 않는 롱 테이크 촬영 방법은 <버드맨>의 그것보다는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물어봐야 한다. 작정했다면 더 긴 테이크로 영화를 구성할 수 있었을 텐데, (감독의 원칙에도 되도록 롱 테이크를 추구할 것이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레버넌트>는 어떤 장면에서, 왜 이 원칙을 포기해야 했을까.
가장 먼저 추측할 수 있는 답은 통제할 수 없는 대자연이 주는 ‘한계’다. 그 속에서 촬영이 이뤄졌기에, 기술적으로 포기해야 했던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추측할 수 있는 답은, 이 영화는 <버드맨>과 달리 한 명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거다. <레버넌트>는 크게 ‘글래스, 피츠, 원주민’ 이렇게 세 개의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밖에도 롱 테이크가 아닌 장면에는 다양한 기술적 한계와 감독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 중에서 명확히 감독의 ‘의도’라고 판단할 수 있는 장면은 그가 작정하고 배치한 장면, ‘인서트 컷’(신과 신 사이에 인위적으로 삽입된 장면)이다. 기존 시점과 완전히 분리된 그 장면은 분명 감독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놓아둔 결과물일 테니까.
분절된 인서트 컷엔 유독 자연을 담고 있는 장면이 많다. 하늘, 협곡, 산, 강, 설원 등 카메라는 넓은 화면에 자연의 색과 온도를 한껏 담고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피처럼 보이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그는 작정하고 ‘자연’을 스크린에 전시했다. 인공광을 거부하는 그의 원칙을 생각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감독은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자연을 스크린에 옮기고, 그것을 관객이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리고 이 ‘자연’은 <레버넌트>의 소재이자 주제에 닿아있다.
<레버넌트>엔 신을 언급하는 몇몇 장면이 있다. 피츠제럴드(톰 하디)는 자신의 굶주린 아버지가 언덕 위에서 신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가 만난 것은 통통한 다람쥐였는데, 그 만남 덕분에 피츠의 아버지는 배를 채우고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죽음 직전에 배를 채워준 자연의 일부, 그 다람쥐가 피츠의 아버지에겐 신이었다. 재미있게도 이 다음 장면에서,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이와 유사한 체험을 한다.
영화의 중반부, 휴 글래스는 아리카라 족을 피해 강물에 몸을 던진다. 떠내려온 그는 허기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었고, 복수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굶주림으로 고통스러워하던 그 밤, 글래스는 언덕 너머에서 황소 고기를 먹는다. 힘없는 글래스가 먹기 좋게, 늑대가 사냥을 마친 황소가 설원에 누워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고기 덕분에 글래스는 기력을 회복했다. 이는 앞의 피츠 아버지 이야기를 소환하고 ‘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있는 두 사람, 피츠의 아버지와 글래스가 언덕 위에서 만난 것은 삶의 연장을 가능케 했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동물, 즉 자연은 신이 될 만하다.
그리고 <레버넌트>의 자연은 인디언과 밀접하게 닿아있다. 그들은 자연과 공존하는 존재이면서 수호자이고, 파괴된 자연을 대신해 분노하는 대리인이기도 하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의 개척시대. 사냥꾼들이 모피를 얻기 위해 동물을 죽이고, 이 과정에서 인디언과 마찰을 빚던 시기이다. 미국의 발전을 위해, 밟혔던 원주민의 역사를 <레버넌트>가 기록하고 있었다. ‘너희가 우리의 것, 땅과 동물을 뺏어갔다’라는 부족장의 대사는 이들의 분노와 갈등을 선명히 보여준다. 비슷한 배경으로 했던 과거의 서부영화가 인디언, 원주민을 적대자의 위치에 놓는 것과 달리, <레버넌트>의 원주민은 보금자리를 잃은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연과 동화되어 사는 원주민을 ‘자연’ 그 자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가정해본다. 이 가설을 앞서 언급한 내용을 연관시키면 어떨까. 자연은 신이고, 자연과 동화된 원주민도 신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면 원주민은 신이다. 이렇게까지 단정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그들이 신의 대리자 혹은 신의 섭리를 체득한 인간의 위치로 이해하면 어떨까. 이 장면을 보자. 영화 후반부에 글래스는 피츠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복수는 자신의 손이 아닌 신에게 맡겨야 한다며, 원주민들에게 피츠를 흘려보낸다. 이 장면에서 원주민은 글래스에게 신 혹은 신의 대리자가 되었다.
생각해볼 장면이 하나 더 있다. 글래스가 ‘언덕 위’에서 구원의 대상을 만났을 때, 원주민이라는 존재도 함께 있었다. 이 원주민은 글래스에게 음식을 허락하고, 그의 여정에 동반하며, 아픈 그를 치료해주고는 사라진다. 그를 죽음의 문턱에서 끌고 나오는데 인디언이 한몫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등장과 퇴장은 원주민을 더 기이한 존재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구석이 있다. 혹은 이 원주민을 글래스의 상상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인디언과의 만남은 더욱 영적인 존재와의 접촉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떨어지는 눈을 보고 해맑게 입을 벌려 맛을 보는 원주민은 자연과 교감한 글래스. 그는 원주민을 만나 치료받고, 자연을 체험했다. 이는 신의 섭리 혹은 영역을 체험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읽힌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