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의 정체
<시카리오>의 멕시코는 범죄와 폭력이 만연하고, 총성이 끊이지 않는 도시다. 시체가 다리에 전시될 정도로 살벌한 곳이다. 영화는 그중 마약 카르텔을 중심에 두고 있으며, 이 조직은 나라의 시스템을 부패시키고 있다. 부패의 썩은 냄새가 얼마나 퍼졌던지, 멕시코 경찰에게까지 닿아있을 정도다. 영화에서는 실비오(맥시밀리아노 헤르난데즈)라는 부패 경찰이 그 대표 자격으로 등장한다.
국경 너머의 미국은 멕시코의 상황에 크게 개입하지 않는다. 마약 카르텔이 미국을 공격하고, 그들이 안보에 위험이 될 때가 되어야만 미국은 국경을 넘는다. 하지만 그것도 매우 제한적이다. 표적이 되는 인물을 비밀스럽게 잡아오는 일에 인력을 투입할 뿐, 그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는다. 미국이 타겟 이외의 대상에게 보이는 행위는 ‘관조’였다. 그리고 <시카리오>엔 이 관조적 시선을 보여주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첫 번째 이미지는 멕시코 밤하늘을 수놓는 빛이다. 작전을 마친 케이트에게 한 군인이 다가와 불꽃놀이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그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가고, 정말로 불꽃을 목격한다. 하지만 이는 놀이라기엔 너무도 잔혹했다. 이 불꽃의 실체는 예광탄(불빛을 내며 날아가는 탄환)이 만들어 낸 빛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을 향하는 것이라면, 그 끝엔 피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이 공간은 누군가의 목숨이 오가는 전장, 혹은 학살의 장이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관전자 미군에겐 그저 하나의 볼거리일 뿐이었다.
두 번째 이미지는 극부감으로 촬영된 멕시코의 지형이다. <시카리오>엔 케이트가 멕시코로 이동하는 항공기 장면부터 극부감으로 촬영된 멕시코의 지형이 등장한다. 이 이미지는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의 미니맵을 연상하게 하고, 공간을 독특하게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우선 하늘과 땅의 간격을 느끼게 하는데, 그 간격만큼이 미국과 멕시코의 심리적 거리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카메라는 3D 지형을 2D로 눌러서 보여준다. 2D가 된 멕시코의 지형은 사람들이 숨 쉬는 입체적 공간이 아닌, 좌표로 수치화되는 평면적 공간이 된다. 작전을 위해 수치화되는 계량적 공간, 그리고 전술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통로. 미국은 그렇게 멕시코라는 지형을 단순화시키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타자화한 뒤 관조하고 있다.
다시 돌아와, 맷이 케이트를 멕시코에서 활동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이 이유는 결국 알레한드로와 케이트의 교집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멕시코와 연결한다면 ‘부패’한 도시에서 살아남고, ‘관조’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그녀가 선택되었다 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그녀에게 ‘관조’하는 능력은 부족해 보였다. 민간인 앞에서 총을 쏠 수 없고, 작전에서 적법성을 따지는 케이트는 목적을 위해 법을 무시할 수 있는 알레한드로와 겹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녀는 ‘정의의 명분’이 될 수 있었지만) 함께 작전을 나갈 때, 알레한드로는 케이트에게 이런 말을 한다. ‘결국, 당신도 이해할 거요’ 과연 그녀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모든 작전이 끝난 뒤에 알레한드로는 케이트에게 총을 겨누며, 이번 작전이 적법했다는 서류에 서명하라 한다. 그리고 그녀는 총구 앞에서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장면에선 영화 내내 볼 수 없던 그녀의 약한 면을 볼 수 있다. 이 연약한 모습은 총구 앞에서 느낀 두려움이 표현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방법(세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한 여인의 서러움이 드러난 것일까. 더불어 이 서명이 자발적인 것인지, 공포에 의한 것인지도 우리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저 추측해야 한다.
이어지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케이트는 알레한드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총구를 내린다. 케이트는 그녀가 추구하던 가치를 무너뜨리고, 심지어 협박까지한 알레한드로를 처벌할 수 있음에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 그에게 총을 겨누고 있던 시간 동안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미국에서 케이트는 법의 절차를 따랐지만, 테러를 막을 수 없었다. 주범에게는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멕시코에서는 다르다. 그녀는 미국에서 볼 수 없던, '피로 완성된 달콤한 복수'와 '비릿한 정의'를 목격했다. 법안에서의 임무 실패, 법 밖에서의 임무 성공. 강직하고, 준법정신이 뛰어난 그녀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케이트가 알레한드로를 살려줬다는 것엔 서로 다른 극단적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 자신은 사적인 감정으로 상대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현(자신이 추구하던 가치를 지키겠다는 의지), 혹은 알레한드로의 방식을 인정하는 수용의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후자로 읽힌다. 그녀는 총을 겨눈 상태에서 강제로 서명한 서류를 없애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 공범이 되는 것을 묵인하는 듯하다. 서명이 끝난 뒤 ‘법이 살아있는 작은 도시로 가시오. 여기선 살아남지 못해요.’라고 말했던 알레한드로. 마약 카르텔에 의해 법이 무너진 멕시코를 경험한 케이트는 범죄와의 전쟁을 위해, 알레한드로의 방식이 필요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알레한드로가 예상했던 것처럼, 케이트는 그를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먼저, 앞서 언급된 분노를 말할 수 있겠다. 케이트가 이해할 수 없는 작전에서 끝까지 버텼던 것은 주범을 잡아야 한다는 분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상징적인 공통점 하나가 있다. 알레한드로는 검사로 일하던 시절, 카르텔에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되었다. 케이트 어떤가. 그녀는 이혼했고, 아이도 없다. 즉, 그녀도 역시 혼자다. 두 사람에겐 현재 가족이 없다. 가족을 잃은, 없는 이들의 카르텔 퇴치 작전. 두 사람은 가족이 없기에 얽매일 곳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점이 케이트가 선택받은 중요한 이유다.
영화에서 조명된 인물 중, 끝까지 살아남은 이들의 공통점은 가족을 잃었다는 것이다. <시카리오>는 가족을 잃은 이들의 가족을 잃지 않은 자들에 대한 복수, 이 구도로 도식화해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제목은 더 섬뜩한 것이 되어버린다. <시카리오>를 가족을 잃고 남겨진 자가 승리하는 서사로 정리할 수 있다면, 이 영화가 보여준 피와 복수는 끝없이 반복되는 나선 위에 서게 될 것이다. 멕시코 부패경찰 실비오의 죽음으로 남겨진 아들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이 영화 속의 시간이 계속 전개된다면, 성장한 소년은 아버지의 복수를 시도할 것이다. 그에게 정의라는 관념은 필요 없다. 소년에겐 상실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가 가장 중요할 테니까.
아버지를 잃은 아이가 축구를 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자. 아이들이 축구를 하는데 총성이 울리고 경기가 잠시 멈춘다. 그리고 다시 경기가 시작된다. 축구장에 있는 사람들은 총소리에 놀라지 않고 동요하지도 않는다. 이들에게 총성은 일상적인 것이고, 죽음의 이미지, 혹은 복수는 낯선 것이 아니다.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 총성으로 누군가는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었을 것이다. 역으로 이는 또 한 명의 암살자가 될 인물의 탄생을 알리는 총성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한 그 아이들 모두가 잠재적 암살자가 될 수 있다는 섬뜩함.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암살자‘들’의 도시라는 디스토피아를 예언하며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