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기#037 동주(1)

‘작가’라는 호칭의 경계

버스를 타고 이동 중에 보게 된 <동주>의 포스터. 누가 더 화려한가를 뽐내는 도시의 이미지들 속에 그 포스터만이 세월을 잊은 듯하다. 시간을 잊고, 도시를 바라보는 두 얼굴의 미소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두운 시대, 아픈 이야기와 대면하는 것은 관객으로서도 힘든 일이지만, 포스터에서 전해지는 힘이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흑백이라 좋았던 영화. 과거의 시간과 함께, 고전 영화의 느낌까지 재현한 영화. 그리고 화려함에 기대지 않은 우직한 영화. <동주>에 대한 첫인상은 그랬다.
movie_image (3).jpg


두 명의 작가

(1) 어떤 글을 담아야 했을까

<동주>는 작가로 등단하는 몽규(박정민)로 시작해, 사후에 시집이 출간되고 작가가 되는 동주(강하늘)의 이야기로 문을 닫는다. 몽규는 작가가 된 자의 현실인식과 시대에 참여하는 혁명가의 모습을, 동주는 작가가 되지 못한 자의 문학에 대한 애정과 이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시대적 불안정함과 함께, 작가가 되었던 청년과 작가가 되고 싶었던 청년이 가지는 간극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두 친구는 문학이라는 교집합을 가지지만, 몽규는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글을 원했다. 반면, 동주는 시 자체의 아름다움을 고민하는 글을 썼다. 그는 암울한 시대에 시를 쓰는 이의 아픔, 자괴감 등을 담으며, 시가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바랐다.


이런 두 친구가 함께 문학 활동을 하면서, 부딪히는 장면이 있다. 몽규가 생각하는 현실 참여적 소설의 중요성과 동주가 품은 시의 가치가 대립하고, 두 친구는 열렬히 의견을 토해내며 날을 세운다. 문학의 종류에 가치와 순위를 매길 수 없겠지만, 한정적인 공간 안에 어떤 글을 담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 대화는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특정한 시기, 특정한 공간에 단 하나의 장르를 담을 수 있다면, 어떤 것을 담아야 할까. 그리고 무엇이 더 옳은 일인가. 이것은 윤리의 문제인가. 아름다움의 추구가 정의의 추구로 이어질 수 있는가. 두 사람은 문학을 두고 거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좁은 방에서 미학과 철학이라는 세상과 부딪히고 있었다.

movie_image (4).jpg


(2) ‘작가’라는 호칭의 경계

두 사람의 갈등은 성격, 문학에 대한 가치관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서로가 세상을 바라보는 위치에 따른 차이로도 읽을 수 있다. 동주는 위험을 각오하고서라도 ‘시집’을 출간해 작가가 되고 싶었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 했다. 그에게 작가는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인장이며, 혼란한 시대에 글을 쓰며 저항하고 있다는 정체성을 증명해줄 지위다. 영화에서 표현한 동주의 복잡한 심정 중, 몽규를 향한 부러움 혹은 열등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신화 속의 인물처럼 거리감이 있던 동주가 인간적으로 다가오고, 더 공감하고 싶은 인물로 느껴지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미 작가가 된 몽규의 눈은 문학을 넘어 세상으로 향하고 있다. 그는 문학을 위한 작가가 아닌, 세상을 위한 혁명가가 되기 위해 새로운 방향을 정했다. 그는 혁명을 위해 문학을 이용하듯, 세상을 위해 작가라는 지위를 빌린다. 몽규는 동주가 바라던 작가라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다음을 계획하고 그려볼 수 있었다.

동주는 생전에 작가라는 호칭을 얻지 못했지만, 역으로 이 덕분에 더 좋은 시를 쓰려 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 출간된 시집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적 성취로 남았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글에 담고, 시에 대한 사랑과 시대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청년. 그렇다면, 동주가 ‘작가’라는 호칭을 일찍 얻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가졌던 시의 색깔은 많이 달라졌을까. 다른 작가를 소환해 보자. <동주>엔 또 한 명의 시인 정지용(문성근)이 등장한다.

movie_image.jpg

정지용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는데, 영화엔 나라를 뺏기고 시인이 가지는 감정이 표현되어있다. 시대를 향한 분노, 비애 등을 술 한 잔에 털어내는 정지용. 그에게서도 암울한 시대에서 ‘작가’로서 느끼는 무기력함, 부끄러움 등이 있었다. 동주처럼 무기력함을 느꼈지만, 영화 속 모습에서는 글을 쓰는 일에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글에 대해 집착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다르다. (속세에서 도피한 듯했다) 몽규와 정지용과 비교한다면, 동주는 ‘작가’라는 호칭이 없었기에 더 절실히 시에 매달리고, 사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동주> 속 작가의 호칭을 얻은 자들이 공통으로 보이는 행동이 하나 있다. 동주에게 적극적인 행동을 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씨개명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정지용은 동주에게 일본에 가서 공부를 더 하라고 한다. 불의에 맞서며 적극적인 운동을 하라는 말 대신, 배움을 이어가 작가의 길을 걸으라 한다. 몽규 역시 정지용과 유사한 행동을 한다. 그는 자신이 혁명을 위해 최전선에 서려고 하지만, 동주에겐 함께 하자고 하지 않는다.

movie_image (5).jpg


어떤 이유 때문일까. 동주가 안전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을까. 혹은 자신이 추구할 수 없는 문학도의 길을 친구가 걸어줬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는 언제 순수 문학을 포기했을까. <동주>엔 몽규가 암살을 하는 장면이 있다. 비교적 초반부에 배치된 이 장면을 통해, 관객은 몽규가 손에 피를 묻혔고, 그만큼 더 참혹한 현실에 발을 디뎠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만큼 순수 문학이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멀어졌음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을 아름답게‘만’ 볼 수 없다. 문학이란 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이상을 가질 수도 없었다. 이런 몽규는 동주의 시에 담긴 순수함과 이상을 더 지켜주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세상의 쓴맛과 비린내 나는 피 맛을 자신만 맛본 게 아닐까. 적어도 영화에서는 그렇게 보였다.


다음 편에 계속....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영화 일기#036 검사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