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기#037 동주(2)

이준익 감독이 시간을 구성, 소환하는 방식

이준익 감독의 변화

(1) 역사를 다루는 방법의 변화

<동주>에서 드러난 부끄러움의 감정과 예술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최근 이준익 감독의 필모그래피와 연결하면 흥미롭다. 최근 연출한 <사도>, <동주>는 이전 작품들과 온도 차가 있다. 단 두 가지 작품만으로 정리한다는 것이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황산벌>, <왕의 남자>,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 <평양성>과 큰 차이를 보이는 몇 가지는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영화의 분위기, 톤 앤 매너다. 과거의 작품은 역사를 유쾌하게 연출해 즐거움을 전달했다. 이에 비해 <사도>, <동주>는 영화가 무거워졌으며, 유머를 배제하지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배치해뒀다. <사도>엔조(송강호)가 귀를 씻으며 보이는 행동들, <동주>엔 강처중(민진웅)이 코믹한 장면을 보여주지만, 결코 그 정서가 영화의 중심에 있지 않다. <사도>의 코믹한 부분은 정조의 습관이라는 정보를 덜 지루하게 전달하기 위해 배치되었고, <동주>의 코믹함은 암울한 시대의 청년들에게 잠깐이나마 있었던 빛을 보여주기 위해 배치된, 그래서 오히려 더 아련한 장면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보이는 특징은 사료에 기초한 사실성이다. <황산벌>은 계백, 관창 등의 역사적 인물이 나오지만, 사실성보다는 상상력과 유머러스한 재해석에 기댄 영화였다. 그리고 천만 관객으로 유명한 <왕의 남자>는 사료에 기록된 단 한 문장을 확장하여 보여준 영화였다. 이에 비해 최근의 두 작품은 사료에서 가져온 디테일이 빛나는 영화다. 여러 인터뷰에서 이준익 감독은 <사도>, <동주>에서 역사적 자료를 굉장히 많이 찾아 읽었고, 참고했다고 밝혔다. 이전 작품도 많은 자료를 참고하고, 그를 기반으로 만들었겠지만, 최근엔 역사를 재현하는 방법이 분명 달라졌다.


이준익 감독이 역사를 재현하는 방법이 달라졌음은 영화의 구성에서도 볼 수 있다. 이전 작품들에서 영화 전체의 시간은 정방향으로 흐른다. 즉,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하며 역사적 사건들을 선형적으로 배치했다. 하지만 <사도>와 <동주>의 영화적 구성은 비선형적이다. 두 작품의 시간은 정방향으로 흐르면서, 동시에 플래시 백으로 나뉘어있다. <사도>는 뒤주에 갇힌 7일을 보여주면서, 하루마다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보여줬다. <동주>는 형무소에서 취조 받는 동주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취조에 등장한 정보를 기준으로 과거로 돌아간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도 마찬가지고, 그런 작품이 꽤 많은데 한국영화에서는 별로 사용되지 않은 전개방식이기도 하다.” - 씨네21. 이준익 인터뷰. “제일 안 좋은 건 시도하지 않는 거다” 본문 중

이준익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소묭>의 구성을 참고했다고도 밝히며, 이러한 플래시 백 구성의 흥미로운 점을 말하기도 했다. 그는 역사를 재현하는 자신만의 방법, 구성을 정립한 듯하다. 그는 왜 이러한 변화를 시도하게 되었을까. 두 가지 측면을 추측하자면, 하나는 시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 더 ‘영화적’이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시공간을 자유롭게 배치, 배열하면서 독특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가 과거와 다르다면, 이는 시간을 더 자유롭게 배치하고, 다루면서도 대중에게 자신의 의도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다른 하나는 과거엔 사실성보다 상상력에 초점을 맞춘 역사 영화였기 때문에, 시간을 변주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사실에 가까워질수록 다큐멘터리와의 변별점을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영화가 단순한 역사적 재연에 머물지 않으려면, 사료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고민할 시기가 온 것이다. 시간 순서에 따른 평범한 방법 외의 것을 고민했을 것이고, <사도>와 <동주>는 그가 찾은 답인 것 같다. 향후, 이준익 감독의 다음 역사 영화를 봐야겠지만, 최근 두 작품의 구성은 꽤 안정적이었고, 대중의 호응도 끌어낸 성공적인 연출이기에 인상적이었다.


(2) 영화의 역할에 대하여

역사 영화는 아니지만, <소원> 역시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의 두 영화와 엮어 볼 만하다. <소원>은 아동 성폭력이라는 굉장히 민감한 소재를 다룬 영화다. 실제 피해자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스크린에 보여주는 것에 마냥 찬성할 수만은 없던 영화이기도 했다. 그래서 개봉 당시 혼란스러웠다. 이 작품을 그 피해자가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역으로는 이러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중의 관심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이 두 가지 생각 중 무엇이 더 옳으며, 윤리적인 것인지 고민해야만 했다. 이는 확장하자면, 사회 문제에 대한 영화의 역할, 책임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여전히 <소원>이라는 영화를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동주>라는 안경을 쓰고 <소원>을 본다면, 이준익 감독의 의도는 읽을 수 있다. 그는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주로 맡았던 현실 참여, 변화를 향한 시도가 극영화에서도 가능함을 보여주려 했다. 많은 대중이 관람하고, 공감하는 영화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민감한 소재의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믿고 싶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이번 영화에서 동주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동주의 시가 품은 이상을 영화도 품을 수 있다고 외치는 듯했다. 그의 시도가 어디까지 갈지, 어떤 성취를 이뤄낼 수 있을지는 아직 예상할 수 없다. 앞으로 펼쳐질 그의 필모그래피와 사회적 반응과 변화를 볼 때까지는 판단을 유보해야 할 것이다. 우선은 극영화의 열렬한 관객으로서 그의 시도를 응원한다.


동주를 이 시대에 소환한 이유

어떤 역사의 재현은, 그리고 특정 인물의 소환은 늘 지금 현실에 어떤 대화를 시도한다. 그렇다면 이준익 감독이 동주를 소환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이준익 감독 개인에게 이 영화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어떤 무기력함과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이고 성찰이며, 저항의 몸부림이자 다짐과 같은 영화일 수 있다. 그는 몽규가 ‘시’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듯, 영화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는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영화를 향한 뜨거운 열정에서 답을 구하고자 했다. 그가 굳이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이유가, 영화적 순수성을 되새기고자 한 발버둥은 아니었을까.


한편, <동주>는 지금 이 시대의 청년들과 공유하는 것도 있다. 동주가 느꼈던 무기력함과 부끄러움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서다. 시대는 변했으나, 시대적 억압은 다른 얼굴을 하고, 청년들을 짓누른다. 삼포를 넘어 n포 세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시대의 청년들은 강요된, 억압된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 청년들에게 자신의 삶을 버텨내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의 가치를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더불어 이중엔 사회를 바꾸지 못함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청년도 있을 것이다. 이들에겐 시대를 바꾸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것, 윤동주처럼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음을 위로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서 묵묵히 자신만의 저항의 길이라도 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사족을 붙이자면, 영화적 지식이 부족하여 글에 시도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동주>엔 고전 일본영화가 주는 정서가 있는 것 같았다. 이준익 감독이 영화의 구성을 위해 참고했다는 <라쇼몽>에서 느꼈던, 어떤 느낌이 이 영화에도 있었다. 단순히 이야기의 배치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흑백영화라는 공통점 외에도, 정적인 느낌과 인물을 프레임에 담는 방법 등 뭔가가 유사해 보인다. 그가 영화의 순수성을 되새기며, 고전 영화의 정서, 정신을 이식하기 위해 뭔가 손을 쓴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해본다. 직접 본 유일한 동양의 고전 영화가 <라소묭>이었다는 점에서 더는 글쓰기를 진행할 수 없었다. 좀 더 많은 영화를 비교할 수 있었다면, 좀 더 영화적인 글이 되었을 텐데…. 아쉬웠다. 아니, 영화에 대해 글을 쓰면서도 영화를 모른다는 점에서, 글을 쓰고 있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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