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시' 볼까, 말까?
*이 포스팅은 소정의 비용을 받아 작성되었으며, 내용은 주관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로 시작하는 <오후 네시>는 ‘나의 본성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진다. 심오하고 어려운 문제이지만, 질문을 던지는 방법이 어렵지는 않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누구든 경험할 수 있는 상황에 관객을 몰아 넣고, 함께 사유하게 한다.
<오후 네시>는 안식년을 갖는 교수 정인(오달수 분)과 그의 아내 현숙(장영남 분)이 전원생활의 꿈을 이뤄줄 새집으로 이사를 하며 시작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평화를 기대한 두 사람의 꿈은 불청객의 등장으로 산산 조각난다. 매일 오후 네시면 옆집 이웃 육남(김홍파 분)이 정인의 집에 방문해 2시간 동안 그들 집에 머물다 돌아간다. 이웃을 배려한다는 마음에 육남의 방문을 절대 거절하지 못하는 정인. 하지만, 매일 같이 문을 두드리고, 자신의 안식을 방해하는 육남에게 정인도 조금씩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심리적으로 피폐해져 간다.
이 영화는 한정된 공간에서 소수의 인물들이 끌어가는 영화로, 고요한 듯 보이나 인물들의 내면은 요동치고 있다. 그리고 이 대비를 보는 게 흥미롭다. 오후 네시를 기점으로 반복되는 구도 속에 정인과 현숙의 내면엔 균열이 일어나고, 동시에 긴장감도 서서히 올라간다. 이웃 육남이 등장하면 불편함 때문에 정인과 현숙은 숨을 못 쉬고,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는 객석까지 퍼져 관객을 답답하게 만든다. 원작인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오후 네시』가 치밀한 심리 묘사로 찬사를 받았듯, <오후 네시>도 심리적 압박감의 시각화가 돋보인다.
그리고 이를 시각화할 수 있었던 것 배우들의 역할이 크다. 2시간에 달하는 <오후 네시>의 대부분을 오달수·장영남·김홍파만으로 채웠다.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 왔던 이들의 관록이 빛나는 순간이다. 특히, 감정 변화의 폭이 가장 큰 정인에게 많이 기대야 했던 영화다. <올드보이>, <베테랑>, <달콤한 인생> 등 다양한 장르에서 관객을 웃고 울렸던 오달수의 필모그래피 덕분에 <오후 네시>의 비교적 일상적인 장면도 코미디와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적 분위기를 풍길 수 있었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저택의 존재도 흥미롭다. 정인이 이사 간 저택과 거울처럼 마주 보고 있는 육남의 저택은 <오후 네시>의 극단적인 상황을 암시하는 제3의 인물이자, 심오한 미장센으로 작동한다. 저택의 위치처럼 양극단에 서 있어 섞일 수 없었던 두 사람. 자신만을 생각하는 육남과 타인의 시선만이 중요한 정인은 너무도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고, 매일 오후 네시마다 두 세계가 충돌하면서 갈등은 고조된다. 저택에서 들리는 정적을 깨는 노크 소리, 신경을 긁는 시계 소리는 관객의 심리를 흔드는 또 다른 무기로 활약한다.
<오후 네시>가 준비한 이야기 끝에서 관객이 얻을 수 있는 건 우리 본성에 관한 답이 아니다. 오히려, ‘그래서 나의 본성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객석을 빠져나올 확률이 높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것도 ‘우리가 모른다는 걸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오후 네시>도 우리가 민낯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가짜, 혹은 가면이었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어떤 가면을, 왜 쓰고 살아가고 있는가?’ 어쩌면 이게 <오후 네시>가 준비한 진짜 질문이 아닐까.
*이 포스팅은 소정의 비용을 받아 작성되었으며, 내용은 주관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