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다는 것

by 이성룡

비운다는 것


이성룡


삼십여 년이 넘게

연구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과 연구 자료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채운다는 것은

쌓아 올리는 것이다.

곳간에 저장한 성취이자 풍요이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비워야만 한다.

비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덜어내는 것이다.

날마다 채우며 살았기에

덜어내는 것은 허망이다.

비운다는 것은

주관적인 목표를

자유로운 의지를

세상에 맡기는 것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다가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요

단풍이 낙엽 되어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깨끗이 비워 내었다.

드디어 책장을 비웠으니

스스로 마음 내시경이 가능할까?

책장을 비웠는데

마음이 아닌 배가 고프다.


비운다는것_시3.1_p1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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