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온 저 쪽의 세상
레테의 강을 건너면 기억을 잃어버린다
이승과 저승의 중간 어디쯤, 림보라는 간이역이 있다. 여기에는 죽은 사람들이 온다. 그들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임무는 사자들로 하여금 생전의 기억 중 가장 좋았던 때를 ‘하나만’ 확정해 내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들은 천국에 갈 수 있다. 그러니 도림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개지인 셈이다.
레테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여신이다. 사람이 죽어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 때 다섯 개의 강(슬픔, 탄식, 불, 증오, 망각)을 건넌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망각의 강이다. 그 물을 마시면 생전의 모든 기억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인들에게 저승(천국)이란 삶에 존재했던 모든 것을 잊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사자들과 인터뷰가 시작된다. 다큐멘터리와도 같은 인상을 준다. 누가 배우고 누가 실존 인물인지 구분할 수 없다. 현실과 영화,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다. 22명의 삶이 혼재하면서 도림 근무자들의 삶도 함께 뒤섞인다.
도림 직원들의 업무, 영화제작
도림의 직원들은 사자들의 아름다웠던 기억 하나를 영상으로 제작하는 일이다, 영화 속에서 영화를 제작한다. 여기서 영화에 대한 감독의 입장이 드러난다. 영화란 삶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것, 불분명한 기억에 의존해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재현하려는 것이 이들의 임무다. 직원 한 명 한 명이 맡은 역할에 따라 감독, 스태프가 되며, 도림은 일시에 영화제작사가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들이 제작하는 영화는 기억을 재현하는 것이므로 원초적 리얼리즘(다큐멘터리)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최대한 기억에 가깝게 가려고 노력하는 반영론적(모방론적) 사실주의(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삶들의 기억이란 무엇인가, 불분명한 것이다. 애초부터 불분명한 것을 사실이라고 확정하는 것도 무리가 있지만, 그것을 다시 한번 재현한다는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일련의 인식과정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삶에서) 망각하지 않는 것(a+letheia)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다. 이쯤 되면, 진리(재현된 현실, 영화)는 행방이 묘연하고 찾을 수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관계로 복원되는 사실의 세계, 모치즈키의 결정
사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회상 서술하는 부분들은 사실, 일종의 페이크, 히치콕식으로 말하자면 ‘맥거핀’에 해당한다. 진짜 이야기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 도림직원들의 이야기다. 이들 모두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도림직원들 역시 죽은 자들인데, 천국에 가지 못 하고 여기에 남게 된 것은, 그들 역시 여기에 와서 ‘행복했던 기억 한 가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 한가운데 모치즈키가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다큐와 허구를 섞은 것과 사자들과 직원들을 섞은 것, 그리고 영화와 현실을 섞는 것은, 이쪽과 저쪽-나와 너, 내 편과 네 편 식의 모든 편을 해체하는 방식이다.-의 세계를 통합한다.
통합은 네트워크에 근거한다. 관계성, 와타나베는 아내 교코와의 순간을 선택했고, 교코는 사실 모치즈키와 약혼한 사이였다는 것, 모치즈키는 1923년생 22살에 전쟁터에서 죽어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75세 노인의 모습이다. 모든 것이 뒤섞이고 관계성만 남는다. 와타나베의 편지를 통해 교코가 와타나베와 결혼 후에도 약혼자 모치즈키의 묘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 사실은 시오리를 통해 모치즈키의 깨달음으로까지 이어진다.
잊히기 두려운 여자, 시오리
도림의 책임자 나카무라는 시오리가 모치즈키를 사랑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달은 실재 모양은 변하지 않는데 빛의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종의 은유적 경고인 셈이다. 죽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허상에 끌려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려하지만 시오리에게 닿지 못한다.
시오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내가 누군가의 기억에 남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시오리는 모치즈키를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모치즈키 또한 그 사랑을 약혼녀 교코에 대한 기억에서 떠올린다. 이들에게 사랑은 누군가의 기억에 남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그들 또한 누군가를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장 행복했던 한 순간의 재현, 너
하이데거는 ‘알레테이아’라는 용어를 빌어 존재의 본질, 진실을 찾고자 했다. 기억의 저편에 숨겨져 있던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도달할 수 없는 망상과도 같은 진리를 붙잡고 있을 것이 아니라,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삶을 긍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의 시원적 본질에, 곧 존재자 전체의 은폐, 곧 비밀에 존재 허용이 떠맡겨진다는 것은 비밀에 대한 탈-폐쇄성(Ent-schlossenheit)을 말하는데, 이것과 더불어 비밀에 대한 망각이 철회되고, 미혹이 미혹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비밀에 대한 탈-폐쇄성은 미혹 그 자체로 향한 길 위에 있다.”(하이데거의 ‘진리의 본질과 본질의 진리’, 정은해)
여기서 말하는 ‘탈폐쇄성’이 곧 알레테이아 은유 개념이다. 미혹은 진리를 잃어버린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된다. 이런 논리라면 인간은 존재에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은폐, 폐쇄되기 전의 모습(진리, 진실)을 그 누구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영화)은 진리를 재현하지만 재현된 것은 진리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가 드러내는 방식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 과정이 바로 근대 예술 장르의 탄생(기술로부터의 분리)이라는 것, 그것이 바로 자현성(존재의 자현방식, Wesungsweise)이라는 것이다. 존재자가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벗겨내는 일이 아니라)이 곧 이 ‘미혹’한 세상을 탐구라는 일이며, 도림의 직원들이 하는 작업이 바로 그런 작업이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자면, 형이상학의 단계를 넘어 ‘전회’(존재사유의 전향)의 단계로 넘어가는 일인 것이다.
존재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서, 도림의 직원들이 타인의 삶을 듣기 시작한다는 것은 바로 존재사유의 전향을 의미하고, 이것은 바로 네트워크 관계를 중심으로 한 사실의 구현, 사실의 재현 방식인 것이다. 모든 답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있다는 것을 이 영화, 고레에다 히로가츠는 조용히 웅변한다. 사랑도 그렇다. 삶의 완성을 위해 사랑이라는 미션을 완수해야하는 것이 인간 생의 목적이라면 더더욱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