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편. 탓을 덮는 시간

서로의 숨결과 바람사이

by Surelee 이정곤


정원 한가운데, 작은 분수대 옆 넓은 평상에 현희, 팔연, 도연, 재심이 앉았다.
햇살은 부드럽게 나뭇잎 사이를 통과했고, 바람이 살짝 불어 잎사귀를 흔들었다.
현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그냥 탓을 생각하지 않고 앉아있고 싶었어.
그냥 서로의 숨결과 바람만 느끼고.”
팔연은 작은 돌멩이를 주워 연못에 떨어뜨렸다.
물결이 잔잔하게 퍼졌다.
“나는… 아직도 마음속에서 누군가를 탓하는 날이 있어.
근데 오늘은 그걸 덮어두고 싶어.
이 순간만큼은, 그냥 있는 그대로 서로를 보자.”
도연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래.
내 안의 비난과 분노가 떠오르더라도
오늘만큼은 가만히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재심은 벤치에 등을 기대며
흙냄새와 꽃향기를 함께 들이켰다.
“탓을 덮는다는 건
그걸 없애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옆에 다른 시간을 두는 거야.
꽃을 심듯이, 웃음을 심듯이, 조용한 순간을 심듯이.”
현희가 팔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 예전에는 자주 화냈잖아.
그때 내가 받았던 서운함도 아직 남아 있는데…
오늘은 그냥 그 마음도 함께 둘 수 있을 것 같아.”
팔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나도 네 마음에 못다한 말들이 있었어.
근데 이제는 서로 탓하지 않고,
그 마음 그대로 두고 보는 연습을 하고 싶어.”
도연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웃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탓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자리만 보이네.
그래, 그 자리 위에 우리가 또 하나의 시간을 덮는 거지.”
재심이 조용히 덧붙였다.
“정원에 잡초가 있듯이, 마음에도 잡초가 있지.
근데 잡초가 있다고 꽃을 심지 못할 이유는 없잖아.
오늘 우리는 탓을 덮고
그 옆에 웃음과 시간을 심는 거야.”
현희가 나무 팻말 하나를 들었다.
“[오늘의 자리]라고 적어두자.
누군가가 나중에 와도,
오늘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덮고 함께 있었음을 기억하게.”
팔연이 흙을 살짝 덮고 말했다.
“맞아. 탓은 여전히 자라겠지만,
우린 그 위에 새로운 시간을 덮었으니까.”
도연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쌓이면,
다음엔 누군가 탓을 떠올려도
이 자리의 평화가 기억될 거야.”
네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서로의 마음은 충분히 닿았다.
정원의 바람은 여전히 부드럽게 불었고,
꽃과 잡초, 탓과 기억이 섞인 땅 위에
오늘의 시간은 조용히 덮였다.
그 위로, 삶은 천천히 다시 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