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살아있다
정원 끝자락, 오래된 고물 의자 하나가 있다.
등받이는 살짝 기울어져 있고,
쇠 다리는 흙 속에 반쯤 묻혀 있다.
누군가 고물이라고 할지라도,
이곳에서는 가장 오래된 풍경의 일부였다.
재심은 천천히 의자에 앉아 손으로 흙을 더듬으며 말했다.
“이제 탓은 뽑지 않아도 돼.”
시리즈를 시작했을 때, 우리는 ‘탓’이라는 단어를 문제처럼 다뤘다.
지워야 할 말, 넘어야 할 감정, 벗어나야 할 과거.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그 탓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정원 한켠, 탓꽃이 조용히 피어 있는 것처럼.말 한 조각에 깃든 기억처럼.
미안함과 용서 사이에 생긴 조용한 틈처럼.
현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여전히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이 남아.
그런데 그 마음이 날 미워하게 만들진 않아.
이제는 그냥… 그 마음도 내 일부라는 걸 인정해.”
팔연은 팔짱을 끼고 웃었다.
“세상은 여전히 이상하고,
나는 여전히 툴툴대지만,
누굴 진심으로 미워하진 않아.
내가 가장 많이 탓했던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었으니까.”
도연은 담배를 끄며 말했다.
“젊을 땐 세대 차이, 사회 구조, 가난…
모든 게 탓 같았어.
근데 그 탓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도 들어.”
재심은 흙에 손을 댄 채 조용히 덧붙였다.
“탓은 결국 우리가 삶을 붙잡기 위해 만든 언어였던 거야.
그 언어 덕분에, 우리는 기억하고, 배웠고, 견뎠고, 그래서 조금씩 자유로워진 거지.”
정원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잡초도, 꽃도, 이름 있는 것도, 이름 없는 것도.
누군가는 탓을 잊고 살아가고,
누군가는 여전히 탓이라는 말에 갇혀 있으며, 누군가는 그 탓을 타인에게 돌리고,
또 누군가는 자신에게 향한다.
하지만 네 사람은 안다.
탓은 문제이기 전에 기억이고,
기억이기 전에 관계였으며,
관계이기 전에 존재였다는 것을.
그러니 탓을 없애려 하지 말자.
그저 그 자리를 내 삶 안 어딘가에 놓아두자.
그날, 재심은 희심원 정원의 오래된 벽돌 위에 작은 나무 팻말 하나를 꽂았다.
[탓의 자리]
누구도 없애지 못했지만, 누구도 더는 숨기지 않는 자리.
현희는 고개를 끄덕였고,
팔연은 흙을 한 줌 덮으며 조용히 웃었다.
도연은 벤치에 기대어 미소 지었다.
“이제, 이 이야기도 자리 하나쯤은 차지하게 된 것 같네.”
정원에는 바람이 지나갔고,
탓꽃과 잡초가 서로의 공간을 인정하며 흔들렸다.
누구도 더 이상 탓하지 않았고,
그저 오늘 하루, 서로의 마음을 바라보았다.
재심은 속삭였다.
“우리는 탓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 탓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리고 그날 밤, 희심원 정원에는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았다.
잡초 사이로 핀 꽃들이
조용히 숨을 쉬며, 모든 탓과 기억의 자리를 감싸 안았다.
삶은 계속되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