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존재를 만나다
“싸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
눈을 뜨자마자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면 어딘가에서 울리는 투명한 소리처럼, 그 말이 내 의식을 흔들었다.
외부의 싸움에 몰두하느라 정작 중요한 내면의 싸움에는 무지했음을, 나는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삶은 전투다.’
그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나는 늘 그것을 생존을 위한 바깥과의 싸움으로만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안에 있는 싸움에는 눈감고 살아왔다.
명색이 크리스천이라는 자부심도 무색하게, 내면의 빛을 알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그 실재를 간파하지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내면에는 사라지지 않는 빛이 존재한다.’
종교적 신념과는 상관없이, 나는 이 빛이 우주의 근원이자, 신의 흔적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빛을 마주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있다.
바로 고독이다.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만 통과할 수 있는 빛의 문이자, 영혼이 걸어가는 통로다.
고독이 머무는 그 자리는 우리 삶을 선순환으로 이끄는 나침반이기도 하다.
나는 파킨슨병을 만나 친구삼아 살게 되면서, 호흡과 뇌신경의 소중함을 다시 배우게 되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기운이 사라질 때, 가장 선명하게 느껴지는 건 숨이었다.
안으로 들이마시고, 밖으로 내쉬는 이 단순한 호흡이야말로 생명을 지탱하는 가장 근원적인 힘임을 알게 된 것이다. 숨이 곧 힘이다.
호흡은 내면과 외면을 연결하는 다리다.
그러나 그것이 흐트러질 때, 뇌는 제 기능을 잃고, 신경은 길을 잃는다.
파킨슨병의 뚜렷한 원인은 여전히 미지수지만, 나의 경험상 확신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호흡의 불균형이 뇌기능을 마비시켜서, 결국 존재의 중심을 흐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나는 내 안의 빛을 만나지 못한 채 살아왔다.
나는 고독을 싫어했다. 아니, 두려워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틈만 나면 누군가와 대화해야 안심이 되었다.
소통이라는 이름 아래, 나는 끊임없이 말하고, 끼어들고, 보여지고 싶어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 병을 통해 침묵을 허락하신 건 아닐까?’
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침묵이었다.
침묵은 고독의 첫 걸음이었고, 나는 그 걸음을 외면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알것 같다.
내 안에는 여전히 텅 빈 고독의 자리가 남아 있었고, 그 자리에 머무는 순간에야 비로소 빛의 존재가 다가온다는 것이다.
고독은 나를 정화하는 성막이고, 나를 새롭게 빚어내는 성소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다이아몬드는 광물일 뿐이다.
빛을 알지 못한 존재는, 길가의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빛을 만나기 위해 나는 고독의 자리에 나 자신을 머무르게 한다.
그것은 외면과 싸우는 전쟁이 아닌, 내면의 어둠을 밀어내는 투쟁이다.
가장 어리석은 전투는 외적 싸움에 승리하고도, 내면의 분열로 패배하는 것이다.
아무리 바깥세상에서 성공하고 칭찬을 받아도, 내 안의 싸움에서 지면 결국은 허망한 것이다.
빛 좋은 개살구처럼.
그래서 나는 고독과 친해지기 위해 매일 새벽, 긴 호흡과 명상을 한다.
이것은 나를 억누르는 고행이 아니다.
오히려 약할 때 강함을 주는 그 빛과 연결되는 생명의 호흡이다.
고독은 이제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파킨슨이라는 질병이 나를 고독의 자리에 강제로 데려다 놓았지만, 그 자리는 은총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빛의 존재를 만난다.
고독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 축복의 시간이다.
나의 감정, 믿음, 생각을 더 명확하게 들여다보게 하고, 내면과 외면을 잇는 다리를 튼튼히 놓게 해준다.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게 한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만든다.
고독은 마음에 여유를 주고, 창의성을 자극하며, 나의 내면에서 진짜 답을 찾게 한다.
고독은 정화의 시간이다.
스트레스를 씻고, 부정적인 감정을 비워내며, 더 높은 차원의 의식으로 이끌어주는 힘이다.
나의 깨달음은 이렇게 단순하다.
고독은 단지 나 자신과 연결되는 것을 넘어서, 더 크고 위대한 빛의 존재와 연결될 수 있는 문이라고,나는 믿는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