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와 시간의 온도
어쩌다보니, 여행이 삶의 리듬이 되었다. 낯선 문턱을 넘고, 생소한 시트를 마주하며 하루의 종말과 또 다른 하루의 탄생을 반복하는 여정 속에서, 나는 무수히 많은 숙소를 드나들었다. 그런 내게도 늘 마음속에 맴도는 작고도 묵직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바로 타올에 관한 단상이다.
죽기 전에 다 풀어놓기 어려울 만큼 여행에 대한 기억과 사연들이 쌓였지만, 수건에 대한 이야기는 반드시 한번은 꺼내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내 오랜 여행의 결론은 이렇다. ‘작은 타올’만을 고집하는 나라는, 내 경험상 한국이 유일하다는 것.
대형 호텔은 예외일지라도, 한국의 게스트하우스, 모텔, 민박과 같은 중저가 숙소에서는 언제나 작은 타올 한 두개만 달랑 놓여 있다.
반면 동남아시아에서 유럽, 북미에 이르기까지, 내가 거쳐간 35개국의 숙소들은 저렴한 곳이라도 큰 타올과 작은 타올을 함께 준비해두었다. 심지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문화적으로 유사하다는 일본조차도, 숙소 규모와 관계없이 큰 타올을 제공한다.
처음엔 이것이 단순한 비용 절감 전략이라 여겼다. 실제로 2014년, 태국에서 작은 리조트를 운영하게 되었을 때도, 나는 세탁비 절감과 관리 편의성을 이유로 작은 타올만 두어야 하나 고민했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이 인식의 오류였음을 알게 되었다.
내 숙소를 다녀간 한국 손님들은 하나같이 큰 타올을 사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두고 떠났다. 몇몇 지인과의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십중팔구 그들은 큰 타올을 꺼내지도 않았고, 오히려 작은 타올을 찾았다.
왜일까? 나는 그것이 ‘속도’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인들의 샤워는 어쩌면 의식이 아니라 과업이다. 물에 적시는 행위, 씻는 행위, 닦는 행위, 그리고 속옷을 다시 걸치는 행위까지 일련의 순서가 최소 시간 내에 완료되어야 하는 ‘빠른 미션’처럼 느껴진다. 촉촉함을 즐기기보다는 빠르게 건조시키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그 무엇보다 ‘시간 효율’을 중시하는 문화.
반면 유럽인들의 샤워 후 풍경은 좀 다르다. 큰 타올로 몸을 둘러싼 채 발코니에 나와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다. 물기마저도 하나의 감각으로 천천히 음미한다. 샤워가 끝이 아닌 또 다른 휴식의 시작이라는 듯.
나 역시 처음엔 큰 타올이 어색했다. 묵직하고 다루기 번거로웠다. 손목의 민첩함에 어울리는 것은 언제나 작은 타올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큰 타올이 없으면 오히려 불편하다고 느끼게 됐다. 따뜻한 물기를 품은 채 천천히 마르는 그 감각, 그것이 오히려 ‘여행 중’이라는 실감이었다.
그렇기에, 한국의 게스트하우스를 찾을 때마다 큰 타올이 없어 겪는 불편은 단지 한 사람의 사소한 아쉬움에 그치지 않았다. 외국인 여행자들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단순히 ‘문화적 차이’로 받아들이기보다, ‘기본 서비스 부족’이라는 불편으로 여길 가능성이 크다.
작은 타올이 편하든, 큰 타올이 더 익숙하든, 그것은 각자의 선택이다. 문제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이 관행처럼 작은 타올만을 제공하는 현실이다. 이것은 한국을 찾은 이방인들에게 '한국의 환대'에 대해 왜곡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환대란, 손님이 원할 것을 미리 준비해 두는 배려에서 비롯된다. 상업적 이익을 앞세우는 순간, 그 환대는 삭막해진다.
이따금, ‘세계화’라는 단어가 자랑처럼 쓰인다.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앞서서. 하지만 세계화란, 단지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품을 줄 아는 감수성에서 비롯된다. 작은 타올 하나, 큰 타올 하나. 그것이 누군가에겐 그 나라의 배려와 품격을 보여주는 작은 상징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지금도 여행 중이다.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그 여정에서 만나는 타올 한 장의 온도와 두께는, 여행자가 받는 첫 번째 인사이자 마지막 작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한국의 숙소들이 조금은 다른 눈으로 타올을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 작고 빠른 것만이 능사는 아니니까.
온기를 오래 품는 것, 그 또한 아름다운 문화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