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들의 번개모임

노익짱, 바람불면 웃는다

by Surelee 이정곤


영광종합병원.
재심 덕에 밀린 정기검사를 겨우 해냈다. 혈액검사, MRI, 어지럼증 검사까지 한꺼번에 받았더니 피만 뽑힌 게 아니라 기운까지 쪽쪽 빨려나간 기분이었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도연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점심이나 먹자. 애들 다 모인단다.”
그의 삼총사 친구들—하늬목장의 희범, 옥당열쇠 김사장—다 모인단다.

장소는 영광터미널 옆 전통시장 건너편.
빈대떡처럼 납작 눌려진 건물, 간판 색은 해지고, 벽에는 오래된 광고판이 기대 앉은 골목 어귀에 옥당열쇠 가게가 있다.
그렇게 투박해도 낯설지 않는 풍경 속에서, 우린 다시 만났다.

김사장의 ‘옥당열쇠’는 그 자체로 그의 이력서이자 초상화다.
수천 개의 열쇠들이 공간을 빼곡히 채운, 호흡조차 고요해지는 그곳.
그 열쇠들은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침묵 속에 매달려 있다가,
문득 주인이 오면, 생명을 얻는다.

가게 문 앞 발판은 한쪽이 유난히 닳아 있다.
세월을 맨발로 걸어온 것 같은 자국 이라고 여기니 정겹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열쇠들은 고요히 흔들리며 침묵의 소리로 말한다.
우리도 아직 살아 있소.

“왔어?, 노익짱들!”
김사장이 빛바랜 가죽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종이봉투로 부채질을 하며 웃는다.
그 웃음에는 기름때 묻은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하늬목장 희범 사장은 성소에 출입하는 제사장처럼 젖소들 사이에서 젖짜는 의식을 하다가 달려왔고,
도연은 텃밭에서 고추줄 세우다 장갑도 못 벗을 지경에서도 깔끔하게 차려입고 길을 달려왔다.
글쓰는 크리에이터 정곤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가방에 넣고, 대신에 스마트폰 메모장을 열고
느릿하게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고 옥당열쇠 김사장,
사실은 열쇠박사 겸 동네의 현인으로 속이 깊다.
네 사람은 시간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하나가 됐다.
별다른 인사도 필요 없었다. “왔냐.” “왔지.”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늦은 점심은 가정식 뷔페.
정오를 지나 식당은 조용했고,
그 떠들석하지 않은 틈새에 우리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깊게.

행복은 뷔페음식처럼 선택하는 것이다.
많은 것 중 내 입맛대로 고르는 것.
선택은 결국, 살아 있음의 증거다.

참기름 한 방울로 무쳐낸 가지—
입에 닿자마자, 여름의 잔열처럼 스며들고,
물김치는 혀끝에 청량한 바람을 불어넣는다.
오이김치의 아삭한 숨결은
마치 흰 수건을 햇살 아래 짜던 어머니 손끝처럼 생생했다.

어묵볶음은 시장 어귀에서 받던
뜨끈한 종이컵 국물의 기억을 불러오고,
땅콩조림은 소박한 달콤함으로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트로트처럼 울렸다.

깨죽은 고요한 새벽의 위로 같았고,
미역 냉국은 바다의 살결처럼
입안 가득 파문을 일으켰다.

제육볶음은 불맛의 진심으로 밥을 부르고,
생선가스는 젓가락 끝에서 ‘바스락’ 소리를 냈다.
푸른 고추 한 점은 그 조용한 밥상에 작은 폭탄을 떨어뜨렸다.
혀에 도포된 매운 불씨.
“살았구나, 이 혀도 아직 살아 있었구나.”

미역국 한 숟갈엔 생일 아침 같은 따뜻함이,
하얀 쌀밥 혹은 알알이 살아 있는 잡곡밥 위로
찬들 하나하나가 조용히 제자리를 찾았다.

이쯤 되면 밥상이라기보다
삶을 차려놓은 자리 같았다.

그러나 그날, 입보다 먼저 움직인 건 말이었다.

“이번 장마에 목초지 다 잠기는 줄 알았어.”
희범 사장이 투덜대면,
“그래서 그런가, 가지가 올해 유난히 부드럽네.”
도연이 받는다.

“나도 비를 맞았지. 근데 그건 사람 비였어.”
글쟁이 정곤이 시적인 말을 흘리자,
김사장이 씩 웃으며 말한다.
“야, 그거 써놨어? ‘사람 비’. 시나 되겠네.”

그렇게 이야기의 물꼬가 트이자,
밥보다 말이 먼저 씹혔다.
누구는 무릎 수술한 동창생 얘기,
누구는 조카 손녀 태어난 얘기.
누구는 깻잎값 올랐다는 얘기.

그리고, 갑자기 조용해진 순간.
누가 말했다.

“내 걸음으로 이렇게 모일 수 있으니 복이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힘 빠지면, 오고 싶어도 못 오니까.”

말끝이 뚝 떨어지고,
그 조용함 위로 마음이 내려앉을 즈음—
도연이 손뼉을 쳤다.

“자자, 이 분위기 식기 전에! 아이스크림 내기 사다리 한 판!”

휴대폰 메모장에 대충 그려진 사다리.
‘딸기’, ‘초코’, ‘바닐라’, ‘계산’
그 아래 이름들이 무심히 걸렸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
다만 그리로 가는 길이, 사다리지.”
글쟁이 정곤의 말에
순간 웃음이 어쩌다 발화된 폭죽처럼 터졌다.

결국, 계산은 희범사장과 정곤에게로.
“내가 제일 많이 먹었으니, 된 거지 뭐.”
입은 툴툴대면서도 천원짜리 현금 몇장을 꺼내는 손은 빠르다.

식당을 나서니,
영광읍내의 오후가 조용히 무르익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다시 모여 잠깐 머뭇대다,
각자의 일터로, 밭으로, 책상으로 흩어질 준비를 했다.

헤어지기 직전,
누군가 나직이 말했다.

“다음엔 시장 국밥으로 갑시다. 가을 오기 전에.”

그날의 온기는 오래도록 식지 않았다.
네 사람이 남긴 말, 밥, 웃음, 침묵.
그건 나란히 놓인 밥상보다 더 따뜻한 연회였다.

세월에 구부러진 등에도 여전히,
그들은 사다리처럼 서로를 지지하며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노익짱들의 계절을 함께 건너고 있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