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은 독자의 삶 속에 ‘통(通)’의 개념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한 구체적인 장이다. 그동안 다뤘던 통일감, 통로, 통섭, 통합, 통생 등의 개념이 삶 속에서 어떻게 뿌리내릴 수 있는지 살펴보고, 개인과 공동체 차원에서의 변화 가능성을 탐색한다.>
통일감 — 나를 넘어 우리로 가는 감각
우리라는 말은 언제 시작되는가?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 타인의 아픔에 눈이 뜨이는 순간부터다. 통일감은 단지 민족이나 이념의 통일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의 분열과 내면의 분열을 넘어서려는 ‘감각’의 회복이다. 내 안의 불협화음, 관계의 단절, 사회의 갈등을 넘어 다시 하나의 흐름을 감지하려는 내적 몸짓이다.
현희는 상담소에서 늘 갈등의 현장을 마주한다. 가정폭력, 편견, 분노, 침묵. 하지만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문제의 뿌리는 ‘나는 너와 다르다’는 고립된 감각, 통일되지 않은 감정에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녀는 내담자에게 말보다 ‘경청의 자세’를 먼저 보인다. 말이 다르더라도 우리는 같은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처음으로 ‘우리’라는 감각이 생긴다.
정곤은 오래전 인성교육 학부모 강연 모임에서 한 참가자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나는 늘 나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데, 왜 우리가 돼야 하죠?” 그 말 앞에서 정곤은 무거운 침묵을 지켰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그 참가자가 말했다. “어제 나눴던 말, 어쩐지 밤새 생각났어요. 그래도 우리가 될 수 있겠네요, 조금씩.” 그는 그 순간, ‘우리’는 감정이 아니라 ‘결정’일 수 있다는 걸 느꼈다.
통일감은 완벽한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의 다름 속에서 조율을 선택하는 감각이다. 이 감각은 훈련되지 않으면 무뎌지고, 나만의 진실에 갇히게 만든다. 그러나 일상의 아주 작은 접촉, 예컨대 서로의 이름을 정확히 불러주는 것, 상대의 입장을 유예 없이 부정하지 않는 것, 그런 태도들이 통일감의 토대가 된다.
재심은 병원에서 일하며 다양한 환자와 보호자들을 만난다. 말이 너무 많거나, 너무 없는 사람들. 때로는 오해와 분노로 하루가 흐른다. 그런데 어떤 날, 그녀는 이런 순간이 더 통일감의 연습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이해하려는 마음’이 나와 상대를 잠시나마 연결시킨다. 그 연결은 짧지만, 깊고 따뜻했다.
통일감은 우리에게 “나는 너와 함께 있다”는 감각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 감각이 자주 깨어나는 일상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더 나은 공동체의 시작이 될 수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