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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Jul 30. 2021

꺼져 시간도둑!

예의가 없으면 그냥 사회생활을 하지 마세요

약속을 잡은 지 2주 가까이 지났으므로 전날, 아니면 최소 오늘 오전이라도 리마인드 문자를 보냈어야 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시간 약속 개념이 남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설마 자기가 먼저 보자고 몇 번이나 먼저 요청한 것을 까먹겠나 싶어 간과한 내가 잘못이라면 잘못이라 할 수 있겠다.


약속 장소까지 우리 집에서 걸리는 시간은 도어 투 도어 door to door로 2시간. 왕복 네 시간이니 서울에서 대구나 대전 정도는 충분히 다녀오고도 남을 시간이다. 지난주에 보기로 약속을 처음 잡았던 건 아직 4단계로 격상되기 전이었으니 때는 바야흐로 지난달 말이었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와 만나자고 하기에 아 이 사람은 나를 꼭 만나고 싶은가 보다 하고 알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잡은 후 며칠간 확진자 증가 추세는 범상치 않았고 결국 며칠 더 지나지 않아 4단계로 격상되었다. 2주간만 4단계를 유지하겠다던 정부의 원래 방침대로라면 처음 잡았던 약속을 재차 일주일 미룬 오늘은 3단계로 낮춰졌을 시기였지만, 25일까지라던 4단계는 또 한 번 연장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일주일 사이에 이 약속은 상대방의 머릿속에서 하얗게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점심 약속이었으니 2시간 걸릴 것을 생각하면 아침식사를 하자마자 채비를 해서 출발해야 했다. 출발할 때도 리마인드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에이 설마 잊었겠나 싶어 그대로 버스에 올라탄 게 화근이었다. 도착까지 10여분 남긴 시점 정확히 어디 계시냐, 내가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묻는 문자를 보냈고 정확히 30초 후에 그분은 전화를 걸어왔다. "아하하하 미안 내가 이 코로나 시국에 오게 만들었네~ 약속 취소하자고 얘기한다는 게 깜빡했던 모양이야. 왜 나는 내가 취소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데 우리가 오늘 만날 시간을 정했었나??"


가령 "7월 16일 오후 1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일주일 미루자'라고 한다면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다음 약속이 언제라고 생각할까? 시간은 언급 없이 일주일 미루자고만 했으니 당연히 '7월 23일 오후 1시'로 미뤄졌다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 개념이 남다른 이 분의 머릿속에는 시간 얘기를 하지 않았으니 약속을 제대로 잡지 않았다 생각한 것인지, 정확한 시간을 묻는 추후 연락이 없었으니 약속 자체를 한 적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뭐 대체 그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이분은 내 문자를 받고서야 이 약속을 기억해낸 게 분명했다.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 내 얼굴은 일그러졌고 올해 들어 느꼈던 분노 중 가장 큰 분노가 내 속에서 격동하는 게 느껴졌다. 이 사람 나 싫어하나??????? 엿 먹으라는 건가?!?! 그렇다고 이렇게 정성스럽게 몇 주에 걸쳐 약속을 잡는 방식으로....?


돈을 훔치는 사람만 도둑인가? 보이지 않는 것을 훔쳐가는 사람은?


남의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훔치면 안 되는 것이지만, 돈이야 다시 벌면 되고 물건은 똑같은 걸 다시 하면 복구라고 할 수 있지, 시간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이미 흘러가면 되돌릴 수도, 똑같은 것으로 다시 구해다 놓을 수도 없다는 점에서, 시간을 훔쳐가는 사람이야말로 악질 중의 악질이다.


게다가 시간을 도난당한 사람은 식물인간이라도 된 것 마냥 무기력함을 느끼며 그 시간을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눈을 뜬 채 코 베이는 기분으로 멍청하게 대기해야 한다. 약속을 잊은 상대가 헐레벌떡 약속 장소로 오기까지 나는 한 시간을 멍하니 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길바닥에 시간을 흘리고 있어야 했다. 이렇게 오래 기다릴 줄 알았더면 책이든 뭐든 가져왔을 텐데, 정각에 만나 용무를 마치고 금방 자리를 뜰 거라 생각했으니 시간을 때울 만한 무엇도 갖고 오지 않은 터였다. 내가 시간이라도 많은 사람이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나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그렇듯) 시간이 없는 사람이다. 마음 같아서는 불 같이 화를 내고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성질대로 하기엔 상대는 나보다 나이도 직위도 많았다. 내 상식선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무례함을 두고 장유유서를 따져야 하는 내 상황이 짜증 났다.


너무 큰 무례를 겪으니 내가 이 정도로 형편없는 대접을 받을 사람인가 싶어 자존감이 낮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만약 그 사람보다 나이가 많거나 직위가 높았다면 과연 이렇게 무더운 여름날 똥개 훈련시키듯 먼 길을 오가게 할 수 있었을까? 막말로 살면서 나름 여러 분야에서 유명하고 잘난 사람들 많이 만나봤지만 이 정도로 시간 개념이 없는 사람은 살면서 처음 보았다. 나는 결국 오늘 하루 중 7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그 사람으로 인해 허공에 버려야 했다. 사전에 내가 계획했던 다른 일정 하나를 마칠 수 있었을 시간이었다. 불 같이 화를 내고 그냥 연을 끊을까 싶었지만 꾹 참고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부로 다시는 그 사람을 보지 않을 생각이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사회생활을 할 생각들을 버려야 한다. 그냥 무인도에서 혼자 살다가 죽든지, 그게 아니면 제발 인간을 인간으로 대할 상식과 예의를 갖추고 대인관계에 최선을 다하자. 약속은 '우리 서로의 시간을 함부로 허비하지 않도록 이때 이곳에서 만납시다'라고 상호 정하는 규칙이다. 오늘부로 인맥 가지치기를 해야겠다. 최소한의 예의도 갖출 줄 모르는 사람과 상종하기에 내 인생은 일분일초가 너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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