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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Jan 18. 2022

진짜 위로는 위로하지 않는 것이다

관심과 흥미의 애매한 경계

뜻하지 않은 부음을 듣고 벌써 2 정도가 지났다. 처음 소식을 듣고 며칠간은 밤에 불을 켜지 않고서는 쉬이 잠들지 못했던 나는 이제 불을 끄고  잔다. 사건이 일어났던 건물 쪽은 두려움에 쳐다보지도 못했던 내가 이제는 건물에 출입도   있게 되었다(마음 같아서는 항상 내가 공부했던 방과 연구실에서도 머물  있을  같기는 한데, 아직 시도해보지는 않았다). 세상사 모든 일에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나는 공식적으로 이 일을 목격한 사람은 아니어서, 사실 내가 이 일에 대해 알고 있고 이로 인해 상당히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처음엔 그게 좀 억울했다. 이 일로 인해 겨울방학 마지막 한 주는 정말 너무나 괴롭고 우울하게 보냈고 그로 인해 내 연구 작업도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는데,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왜 이거밖에 못했냐고 물었을 때 그냥 내 개인적인 게으름과 부족함으로 핑계를 돌려야 하는 게 조금 서운했다. 반면 공식적으로 이 일에 개입되어 있고 목격한 사람은 학과 내 모두가 알고 있으니 다들 만날 때마다 괜찮냐 물어봐주고 혹여 뭔가 예정대로 진행하지 못해도 이해해주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이 일에 직접적으로 개입된 친구와 대화하다 보니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에게 알려져 있으니 모두가 자꾸만 이 친구에게 그 일에 대해 물어왔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이냐고, 너는 어떻게 개입되어 있냐고, 걱정해주는 척하면서 캐물어오는 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친구는 매번 그날의 일을 되새기며 대답해야 했고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그의 트라우마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버리는 셈이 되었더랬다. 설명을 반복할 때마다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심정이 참담했다. 걱정과 관심을 가장한 질문들의 끝에는 가십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만이 가득하니까.


걱정과 관심을 가장한 질문들의 끝에는
가십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만이 가득하니까


누군가 내게 물었다. 그저 교수님 한 분 돌아가신 건데 왜 그리 슬퍼하냐고, 엄밀히 말해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너는 너라고. 세상사 그렇게 하나하나 다 신경 쓰다 보면 내 인생 못 산다고. 아마도 사건의 내막을 전혀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일 터였다. 그 앞에서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정이 있다'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았다. 교수님은 세계적인 석학이고 나는 그분을 존경한다. 그런 유명하신 분이 한낱 가십의 주인공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내가 좀 예민하고 오지랖 넓은 사람이 되는 게 낫지... 오해받는 것은 억울한 일이나 뭐 어떤가. 실제의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면 된다. 내가 오해받는 것보다는 교수님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그분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심심풀이 땅콩처럼 오가는 게 더 싫었다.


시간이 흘러 나도 어느 정도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고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조금씩 떠보는 질문을 해올 때가 있었다. 'OOO 씨는 괜찮나요? 걱정이 되어서..., ' '그 일 아시죠? 정말 슬펐어요, 그렇죠? OOO 씨는 어땠나요?' 처음엔 나를 걱정해주고 마음 써주는 듯이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좀 더 자세한 사정이 듣고 싶어서 묻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대개는 '나도 사실은 그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묻는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조금의 실마리도 꺼내놓지 않을 테니. 그때마다 나는 전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잘라 말했다. 걱정과 관심을 가장한 그 흥미로운 눈들에, 일말의 상상력도 더해주고 싶지 않았다. 뭔가 떠보려고 질문하는 그 의도가 괘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지난주에는 학과 전체로 심리상담 시간이 있었다. 코로나 시국이니 만큼 온라인 미팅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두 명의 상담사들의 참관 하에 학과 식구들 중 교수님의 부음에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 세션은 생각보다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나는 상담사들이 뭔가 우리에게 이런 심리적인 위기를 극복할 팁이나 정보들을 알려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짜고짜 우리들에게 각자 느끼는 바를 나눠보자고 했다. 이 사안에 대해 누군가는 하나도 모르고, 누군가는 어느 정도 알고, 누군가는 직접 목격하고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데, 그저 '느끼는 바를 공유하자'는 요청은 난감한 것이었다. 초반 10분 정도는 정말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만이 흘렀다. 그러다 몇몇 사람들이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누구는 너무 괴로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고 누구는 너무 무서워서 지금도 그 건물에 못 가겠다 했고 누구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상담사는 '그 모든 것들은 다 타당한 반응이고 때가 되면 다 조금씩 나아진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직접 마이크를 켜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게 좀 꺼려지는 이들은 상담사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내 상담사가 대신 읽어주는 형식으로 익명으로 이야기했는데, 후반부에 가서 그 일을 직접 목격한 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물론 상담사가 익명으로 읽어주었으나 모두 그게 누구인지 다 알 수 있었다). 너무 힘들었으나 이제는 좀 괜찮아졌고 이렇게 되기까지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고. 원래 나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 메시지에 힘을 얻어 나도 익명으로 상담사를 통해 내 감정을 이야기했다.


나는 슬픔을 공유함에 있어서도 교만하구나


마지막으로 본 교수님 얼굴이 너무 슬프고 지쳐 보였다는 부분을 상담사가 읽어 내려가는데 순간 깨달았다. 말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메시지가 남은 자들을 더 힘들게 만든 것이다. 그냥 나 혼자 괴롭고 슬프고 말 것을, 이것을 공유함으로 인해 이 분들을 더 힘들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 슬퍼졌다. 그리고 사실 엄밀히 말해 나는 그 교수님과 고작 한 학기 함께한 것이 전부였다. 주고받은 이메일 개수를 세본다 한들, 내 나이보다 더 오랜 시간 그분과 함께 동료로서 일해온 교수님들보다 더할까? 정작 제일 힘든 분들은 바로 그런 분들일 텐데, 그런 분들마저 침묵하고 있는데 그 앞에서 고작 한 학기 교수님과 정을 쌓은 내가 슬프다고 괴롭다고 내 감정을 토로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후회가 되었다. 나는 슬픔을 공유함에 있어서도 교만하구나 자책감이 들어 이후에도 사나흘 정도 괴로워했다.


아주 처음에는 뜻하지 않게 이 일에 (간접적으로) 개입된 게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몰랐다면 그냥 여느 교수님들의 부음 소식처럼 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넘어갔을 터였다. 며칠간 괴로워할 일도 없고 슬퍼하거나 무서워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런 일이 왜 내 주위에서 일어났는가 생각했다.


그러다 내가 내린 결론은, 더 이상 '왜'를 묻지 말자는 것이다. 세상사 이유를 알 수 있는 것보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난다. 굳이 왜를 따진다면 아마도 아파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지지하는 것을 배우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슬픈 일이 일어났을 때 가장 좋은 위로는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괜찮냐 물을 필요도 없다. 내가 그 일을 잘 알고 있다고 티 낼 필요도 없다. 어차피 때가 되면 당사자가 알아서 터놓는다. 힘들면 힘든 대로 당사자가 티를 낸다. 그렇지만 곁에는 있어야 한다. 너무 멀리 있으면 괜찮지 않을 때 내게 미처 연락이 닿기도 전에 그가 훌쩍 떠나버릴 수도 있다.


정말 슬퍼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상담 시간과, 그리고 지난 몇 주 동안의 경험들을 통해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정말 슬퍼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일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슬픔과 애도의 마음이 너무 커서, 감히 입을 열 수도 없는 것이다. 어쭙잖게 아는 이들, 어쭙잖게 친분이 있는 이들이 오히려 입을 열었다. 교수님과 함께 연구를 오랜 시간 했었던 내 동료는 논문에서 그분 연구를 인용해야 할 때마다 그분 이름을 타이핑해야 하는데 그 일만으로도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눈물이 난다고 했다. 정말 슬퍼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다. 나는 상담 세션이 진행되는 동안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지만 세션이 끝난 다음에는 눈물을 닦고 마음을 추스르고 점심을 챙겨 먹으러 갔다. 나는 적어도 일상생활은 가능하니 그래도 멀쩡한 셈인 것이다.


이 일은 앞으로 내 남은 삶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다. (1) 누군가가 슬퍼할 때 절대로 그 슬픔이나 감정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것. '저런 일로 뭐 저렇게까지 슬퍼해?'라고 판단하기 전에, 내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을 수 있고, 그는 그것에 대해 밝힐 수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것. 함부로 이제 그만 훌훌 털어버리고 네 삶을 살라는 따위의 주제넘는 조언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들을 하게 되었다. 이후에 모든 일의 전말을 알게 되면 그런 조언을 건넨 스스로가 창피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위로에 있어 말은 최대한 아낄 것.


이것이 진짜 상대방을 위로하기 위한 질문인지
그저 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인지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자문한 뒤에 물을 것

(2) 그리고 아무리 궁금해도 절대로 묻지 않을 것.... 어떤 말이나 질문을 할 때 이것이 진짜 상대방을 위로하기 위한 것인지, 그 사람이 걱정되어 건네는 말인지, 아니면 그저 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인지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자문한 뒤에 입을 열 것. 후자일 경우 어설픈 위로의 탈을 쓴 질문들은 더 큰 상처가 된다. 말을 안 하느니만 못하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 나아질 것이다. 정확한 때는 알 수 없다. 인생은 너무나 짧다. 마냥 행복한 일들만 있을 수 없듯이 마냥 슬픈 일들만 남은 것도 아닐 테지.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지만 어떤 슬픔은 나누면 불행한 사람들만 더 늘어날 뿐이다. 다 밝힐 수 없어 속이 썩어가지만 우리는 묵묵히 이 시간을 견딘다. 조금의 오해를 받으며, 그러나 아는 이들끼리는 서로를 안아주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성경 말씀 한 구절이 유독 생각나는 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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