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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Feb 21. 2024

유학생의 덕목 2: 인생은 독고다이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울 사람은 나 자신뿐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우연히 가수 이효리 님이 국민대학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내용의 일부분이 회자되는 것을 보았다. 일부만 보았음에도 곡절이 많았던 그녀의 연예계 생활과, 그 경험에서 우러나온 듯한 조언에 마음이 짠했다. 한편으로는 최근 내가 생각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을 느끼면서 결국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나 또한 여기서 공부한 경험이 전부이므로 미국의 다른 대학교는 어떤지, 교수들은 어떻게 다른지, 학과마다 차이가 있는지는 사실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이곳에서의 유학 생활을 토대로 경험한 바를 적자면, 미국 교수들은 한국 교수들에 비해 학생들을 직접적으로 '너 이거 지금 해야 돼' 식으로 리드하는 경우는 적은 것 같다. 그게 그 학생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한국 같으면 지도교수가 전적으로 학생에게 할 바를 지시하고 학생은 그냥 그 지시에 따르면서 공부하는 분위기라면, 미국은 학생이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면 자세히 알려주고 도와주지만 학생이 요청하기 전에 교수가 알아서 먼저 나서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 경우는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거의 없다.


두 가지 방식 모두 장단점은 있다. 일단 한국 교수들의 방식은 아직 신출내기에 불과한 대학원생들이 뭘 잘 모를 때 큰 도움이 된다. 지금쯤 이걸 해야 하고, 내년 이맘때쯤 학회에서 발표를 해야 하고, 그런 것들은 직접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사실 입학 초부터 학생 스스로 계획을 짜기 어렵다. 당장 나만 해도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이미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한국 방식은 교수가 알아서 딱딱 지시해 주고 나는 그것에 따르다 보면 어느새 내 이력이 완성되는 것이니까 그런 면에선 장점이랄 수 있겠다. 


그리고 (세상사 대부분의 것이 그렇듯) 장점은 바로 단점으로 연결된다. 교수님의 전략대로만 따르면 되니까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고 실패할 확률도 낮으니 좋은데, 지시대로 따르고 싶지 않은 (즉 교수와 생각이 다른) 경우에는 문제가 생긴다. 내 의견이 없고 그냥 교수 아이디어로 완성되어서 교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상의'라고 할 것이 없고 수평적으로 의견이 교환되지 않으니 학생 입장에서는 본인이 첫 저자나 교신저자로 이름을 올린다 해도 그 연구에 대해 '내' 연구라는 개념이 생기기 어렵다. (다시 한번 주지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내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글이니 이와 다른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와이에서 유학한다고 하면 열이면 열, '우와 너무 좋겠다 부러워요'라는 말을 듣지만 현실은 다르다. 너무 바빠서 캠퍼스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인 와이키키를 올해 처음 와보았다.


미국은 반대로 학생 연구는 학생의 것이라는 개념이 강한 것 같다. '내' 연구이기 때문에 교수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도움은 받아도 결정은 내가 한다. 처음 박사 과정을 막 시작했을 때 교수님들이 이상하게도 내가 조언을 구하면 한창 얘기해 준 다음에 늘 말미에 '근데 이건 내 생각일 뿐이고 꼭 내 말대로 할 필요는 없어. 나도 틀릴 수 있으니까'라는 말을 덧붙이셔서 이 무슨 무책임한 소리인가 의아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도 한국인 학생들은 교수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분위기에서 살아온 경우가 많다 보니 자기 생각과 교수 생각이 달라도 억지로 따르는 경우를 많이 보신 게 아닐까... 그리고 나중에 그게 탈이 나는 경우를 보셨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난 사실 아직도 대학원생 나부랭이일 뿐이고, 내가 아무리 몇 날을 밤새며 고민해도 내 나이보다 더 오랜 시간 학계에 몸 담아 온 교수님들의 조언이 내 결론을 능가할 때가 (당연히) 압도적으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이건 내 생각일 뿐'이라는 말씀을 매번 덧붙이시는 것은 그만큼 '이 연구의 주인인 너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교수님들은 그저 자기 의견을 말할 뿐, 그 모든 의견들을 다 듣고 가장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권한은 나에게 넘겨주시는 것이다.


이전에는 내 연구 관련해 세 분께 의견을 구했는데 세 분이 다 상반된 의견을 주셔서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첫 번째 교수님과 미팅한 다음 그 교수님 의견대로 수정했다가 두 번째 교수님과 미팅을 했더니 또 다른 말씀을 하셔서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세 번째 교수님을 만났다가 더 혼란스러웠던 경험. 결국 지도교수님께 모든 얘기를 하고 의견을 구했더니 교수님 왈, "결정은 네가 내리는 거야. 넌 어떻게 하고 싶어? 넌 뭐가 맞다고 믿니?" 그게 유학 생활 첫 학기도 아니었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음에도 머리를 관통하는 것이 있었다. 아, 이 연구의 주인은 나인데 뭐가 맞는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 기대고 싶었던 것이구나.... 실패를 하기 싫으니 나는 최선의 답을 교수님이 골라 주시기를 바랐던 거구나.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학계에 과연 불변의 정답이라는 것이 있을까? 결국 학자들이 하는 것은 '몇 년도에 아무개가 한 이 주장은 틀렸어! 내가 맞소!'라는 주장의 반복 아니던가? 지동설이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이 철썩 같이 믿었던 것은 그들이 무지해서가 아니었다. 과학의 발전은 그런 것이다. 어쩌면 교수님들은 이곳에서 내가 그런 것을 깨닫길 바라셨던 게 아닐까?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최근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이 어려워져서 우울의 극을 달리느라 학업에 도통 집중하지 못했다. 억지로 꾸역꾸역 아침에 일어나서 강제로 책상에 앉아 페이퍼를 수정하고 논문을 읽다가, 오늘에서야 문득 '내가 나를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일으켜 세워주지도 않고, 나 대신 내 연구를 해주지도 않는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수백 번도 넘게 찾아오지만, 결국 그 모든 장애물을 넘어 이 모든 과정의 종착점에 나를 다다르게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뿐이다.


학업에서 뿐 아니라 결국 인생 전체를 통해서도 내 역경은 나만이 극복할 수 있는 것 같다. 지치고 버겁고 가야 할 길은 아직도 구만리이고 내 곁에는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서, 내가 남에게 해주듯 보살피고 응원하면서, 우직하게 남은 길을 걸어가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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