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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Sep 04. 2024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거울치료를 당하다

바로 이전 글에서 여름에 기숙사 방을 비우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내가 방을 비우지 않은 이유는 사실 하나가 더 있다. 기숙사 체크아웃을 할 경우 그다음에 방학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을 때 동일한 방에 배정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내가 지내고 있는 방이나 이웃들이 맘에 들지 않으면 반길 일이겠지만, 나의 경우는 3년 차에 배정된 이 방이 위치도 그렇고 같은 층에 사는 이웃들도 괜찮은 편이어서 그 이후로는 체크아웃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한 학기, 두 학기, 시간이 흐르면서 졸업을 하거나 다른 기숙사 방으로 옮기면서 한 명씩 달라지는 경우가 생기더니, 이번 학기는 나와 함께 같은 층을 쓰고 있는 학생 3명 중 마지막 1명까지 바뀌면서 처음 이 방에 배정되었을 때 내 이웃이었던 친구들은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것이니, 그리고 또 이후에 새로 들어온 친구들도 괜찮은 편이었다. 서운하기는 해도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들어온 학생 한 명은 바로 내 옆방에 사는데,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다. 기숙사 입소 시기가 정해져 있는 학부생들과 달리, 이곳 대학원생 전용 기숙사는 다 각자 다른 스케줄로 들어오기 때문에, 같은 층에 사는 사람들끼리 개강하고 한참이 지나도 얼굴을 못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친구가 그랬다. 방에서 소리가 나는 걸 보면 분명 그 안에 사람이 사는 것 같긴 한데 서로 타이밍이 맞지 않았는지 개강하고 닷새가 지나도록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다. 사실 그래서 나는 처음에는 지난 학기에 그 방에서 살았던 학생이 다시 돌아와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 것을 알게 된 것은 개강 첫 주의 마지막 날이었던 금요일이 되어서였다. 정확히 오전 6시경에 알게 되었는데, 아직 시차적응을 하지 못해 7-8시쯤 기상하던 내가 6시에 강제 기상하게 된 것은 그 방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로 사람들 대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기숙사 건물들은 대개 1960-7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라 안에 놓인 가구들도 모두 낡고, 특히 벽이 아주 얇은지 방음이 정말 안 된다. 예전에 나는 화장실 바로 옆에 위치한 방에서도 살아 봤는데, 사람들이 볼일 보는 소리, 변기 물 내리는 소리까지 마치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 마냥 생생하게 들릴 정도다.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고 있노라면 가끔 가족들이 '지금 화장실 누가 쓰고 있는 모양'이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여하튼 미팅 소리가 너무 커서, 난 처음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그 방에 와서 회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로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크게 들리려면 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방은 1인실, 딱 고시원 크기 정도의 그 작은 방에 5-6인 되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도 아침 6시부터 모여서 회의할 리가 없었다. 하와이 시간으로 오전 6시면 본토는 가장 가까운 서부라 해도 오전 9-10시는 넘어갈 시간이니, 아마 본토에 있는 사람들과 줌 미팅을 하고 있는 듯했다. 이어폰을 쓰지 않고 스피커 볼륨을 최대로 키운 모양이었다. 이전에 그 방에 살았던 친구도 가끔 아침 일찍이나 밤늦게 라디오를 듣거나 줌 미팅을 하긴 했지만 저 정도로 시끄럽게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직감적으로 '아 옆방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 기숙사에 아예 처음 들어온 사람 같다는 생각도 했다. 이전에 다른 방에서라도 살아봤다면 이 건물이 얼마나 방음이 안되는지, 내가 내는 생활소음이 다른 방에서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모를 리가 없을 테니.


나는 너무 화가 났다. 줌 미팅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지금이 대낮도 아니고 아침 6시에 하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최소한 이어폰을 끼고 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볼륨을 좀 낮춰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난 학기에 내 또 다른 옆방에 새로 들어온 친구가 저녁 7시에 가족과 전화통화하는 내 목소리가 크다고 항의한 적이 있어서, 이후에는 대낮에 줌 미팅할 때도 이어폰을 끼고 하는 나다.) 더욱이 전날 페이퍼를 쓰느라 늦은 밤에 잠든 나로서는 원치 않은 이른 시간에 잠이 깬 것이다 보니 너무 짜증이 났다. 써라운드로 들리는 대화에 이미 잠은 달아났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앞으로도 한동안 회의가 이어질 것 같으니 다시 잠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너무 화가 나서 나도 책상 위에 물건들을 일부러 쿵쿵 힘주어 내려놓으며 수동적으로 항의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게 오히려 악영향을 끼친 것 같다.)


새 이웃은 내 수동 항의를 알아들은 것인지 다행히도 이후에 줌 미팅 소리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내 방에서 회의 내용이 다 들리는 것은 여전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노크를 하고 '볼륨을 줄여 달라'라고 하고 싶었지만, 저렇게 크게 회의하는 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데 굳이 싫은 소리 하고 싶지도 않았고, 어쨌든 중요한 회의 중인 것 같은데 도중에 방해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서로 얼굴 보고 통성명한 적도 없으니 이다음에 복도나 화장실(우리 층은 공용 화장실을 쓴다)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꺼내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 저 수동 항의가 아마 그 학생에게도 짜증을 유발했던 모양이다. 그다음 날인가 우리 층 공용 라운지(테이블과 공용 냉장고가 있어 간단히 식사를 하거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작은 홀이 있다)에서 내가 공부하고 있는데 그 학생이 냉장고에 뭘 꺼내러 왔는지 들어오면서 날 힐끗 보더니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잽싸게 냉장고에서 물건만 꺼내서 휙 나갔다. 숫기가 없는 건지 아는 척을 하고 싶지 않은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하는 걸 즐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도 이미 며칠 전의 그 오전 6시 스피커폰 줌 미팅 사건(!)을 떠올리자면 상종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좋든 싫든 적어도 이번 한 학기 동안 우리가 바로 옆방 이웃으로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 그리고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지내다 보면 서로에게 도움을 받거나 부탁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서로 인사는 하고 지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오늘은 얼떨결에 기회를 놓쳤지만 다음에 만나면 내가 먼저 인사하고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제였던가, 그녀가 외출을 하려는지 방을 나서는데 때마침 나도 나가려고 방 문을 열었다가, 그녀 바로 뒤에 내가 따라 걸어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아는 척을 하려는 순간, 그녀가 핸드폰을 복도에 떨어뜨렸다. 짜증이 났는지 뒤에 있는 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곧바로 F*ck!!!!!!! Sh*t!!!!!!! 큰 소리로 욕을 하는데, 너무 당황해서 감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분명 지난번 새벽에 줌 미팅할 때 (교수로 보이는) 참석자들과 대화하는 목소리 톤이나 분위기는 아주 상냥하고 친절했는데 말이다. 내가 방에서 나가려고 문을 막 여는 순간 그녀가 내 방을 휙 지나쳤기에 내가 자신의 뒤에서 따라 걷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 같지는 않은데, 쌍욕을 바로 때려 박으니 뭔가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대화를 할 자신이 없었다.


오늘 아침엔 심지어 5시도 되기 전에 그녀가 또 열심히 줌 미팅하는 소리에 기상했다. 일어난 시간이 4시 50분쯤이었던 걸 보면 아마 그전부터 회의를 시작했던 것 같은데, 맨 처음에 비하면 소리가 좀 작아지긴 했지만 스피커로 하는 건 여전했다. (이어폰을 꽂고 하란 말이다 제발!) 아 그 새벽같이 하는 줌 미팅이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었구나... 그냥 어쩌다 한 번이면 굳이 싫은 소리 하지 않고 가만히 넘어가려 했는데 주말 지나자마자 또 한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이 시간에 미팅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단 얘기다... 절망.


옆에 사람이 있는데도 쌍욕을 하는 걸 보면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 아닐 것 같은데, 괜스레 조용히 해달라고 말했다가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키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어차피 잠 달아난 거 그냥 일찍 연구실 가서 10시에 있을 면담 준비나 하자 하고 나왔지만, 이후에도 신경이 쓰여서 스트레스를 받다가, 문득 어쩌면 이 일은 맨 처음 내가 수동 항의를 하면서 더 상황이 악화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어쩌면 자기도 하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그 이른 시간에 일어나 회의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 그 정도로 크게 들리는지 모르고, 방음이 잘 안된다는 걸 모르고 볼륨을 최대로 업해서 회의한 건 아닐까?

- 제가 잘못한 것보다도 내가 쿵쿵 거리며 항의성으로 소음을 낸 게 거슬려서 더 삐딱하게 군 건 아닐까?

 

쌍욕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기분이 태도가 되는 미성숙한 사람이군' 혀를 끌끌 찼는데, 어쩌면 처음에 줌 미팅 소리가 너무 커서 불만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차분하고 상냥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찾지 않은 채 내 기분 상했다고 쿵쿵 소리를 내며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불만을 표출한, 나 자신이야말로 기분이 태도가 되는 미성숙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닌지.


마냥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다가 고스란히 거울 치료를 당하고 나서야 내게도 일정 지분 책임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더 평화적이고 우호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는데 내 행동으로 인해 일이 여기까지 커진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불만이 있다고 바로 그것을 드러내고 항의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이제서야, 그것도 이런 유치한 일로 인해 깨닫게 된 스스로가 조금 창피하다.


일단 내 현재 전략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통성명이나 하고 서서히 알아가면서 좀 친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줌 미팅 건을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까 싶기도 한데.. 모르겠다. 졸업논문 쓰는 것만으로도 이미 감당할 스트레스 게이지 가득인데 정말 별 게 다 스트레스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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