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우유와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우유를 마시면 소화를 못해요. 아, 미운 위장!

by 심민경

돌이켜보면 나는 우유를 좋아한 적이 없다. 신생아 시절에 분유를 먹고 설사를 한 게 태반이라, 엄마는 볕 좋은 날 창가에 기저귀를 벗겨 내 엉덩이를 햇빛에 말려 놓은 날이 많았다고 했다. 그래도 초등학교 때는 의무적인 우유급식 덕분에(?) 꼬박 우유를 (강제적으로) 마셨지만, 시리얼 먹는 것 조차 좋아하지 않는 나는 초등학교 졸업을 기점으로 우유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 때문이었을까? 스무 살 초반의 어느 날 라떼를 마신 뒤 심하게 체하고 설사를 하고 나서, 내가 우유를 소화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유와 같이 젖당이 풍부한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는 유당불내증(Lactose-Intolerance)이 있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75%나 유당불내증이 있지만, 아무렇지 않게 라테를 사 마시는 그들이 어느 순간 신기해 보였다. 내게 유당불내증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 나는 우유/두유 선택권이 있는 카페만 찾게 되었다. 밀크티는 꿈에도 꿀 수 없으며, 빙수와 아이스크림 먹기도 겁났다. 그래도 가끔씩 우유/두유 선택권이 없는 특이한 카페의 라떼나 버블티가 궁금해서 먹은 날이면 그 날은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체하고, 빈 트림만 연신 해댔며 다음날 아침은 늘 설사로 고생했다.


2014년 7월엔 내가 어떤 바람이 들었는지, 불어를 배우기 위해 잠시 서울 회현역 근처 알리앙스 프랑세즈에 다녔다. 학원에 들어오기 전, 회현역 주변에 있는 카페 세 곳을 들렸지만 내가 우유를 선택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결국 라떼 마시는 것을 포기하고 수업에 들어갔다. 방학이 끝나고 영국에 들어갔을 때, 학교 유니언에 새로 생긴 버블티 샵이 생겼다 해서 구경하러 갔다.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자체적으로 lacto-free (젖당이 없는) 우유로 밀크티를 만든다는 안내문을 보고, 시내에 있는 버블티 샵보다 좀 덜 맛있지만 그곳을 자주 찾았다. 우유만 마시면 폭풍설 사하는 나에겐 반가운 버블티 샵이었다. 버블티 샵 외에도 학교를 비롯한 영국에 있는 많은 카페에서 우유(무지방/저지방/일반)/두유/락토프리 우유/코코넛 유/아몬드유(운 좋으면) 등을 고를 수 있다 (추가 요금 없이). 우유를 마시지 못하는 나에게 영국은 이점에서 살기 좋은 나라다.


물론 한국에도 점점 우유/두유를 선택할 수 있는 카페가 생겨나고 있고, 심지어 한 프랜차이즈 카페는 락토프리 우유까지 선보이고 있으니 이는 놀라운 발전이다. 그러나, 나에게 또 다른 욕망이 생겼으니, 그건 항아리처럼 생긴 용기에 담긴 빙 XX 바나나맛우유였다. 며칠 전 냉장고에서 막 꺼낸 항아리 모양의 바나나우유를 마시는 중학생 동생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우유를 잘 소화하게 하는 약도 있다는데 (미국에), 2년 전에 한국 약국에서 약사님께 그런 게 있냐고 물어봤지만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었다. 현재로선 내게 바나나우유를 마실 방법이 없다. 그 회사가 락토프리 바나나우유를 출시하지 않는 한은. 물론, 바나나우유를 마시고 싶은 나의 욕망은 변함이 없다. (아이스크림은 포기해도 바나나우유는 먹고 싶도다!)


다행히 나는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는 거 외에 음식 알레르기가 없는 사람이다. 우유 외에 어떠한 음식도 성분표를 일일이 확인하며 먹지 않아도 된다. 우유 섭취만 '못'할 뿐, 다른 것은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까. 이제는 채식을 하는 내 주변 사람 등 음식 선택에 제약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잠시 건강상의 이유로 채식을 했던 6개월 동안, 한국에서 채식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몸소 겪었기 때문에 채식하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다. 가장 힘든 것은 바로 선택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젓갈이 들어가는 김치, 새우가루가 들어간 된장찌개까지 생각하면 비건은 먹을 한식이 없다. 따라서, 나는 이 나라에서 음식 선택에 제약이 있는 사람들이 락토 프리 우유를 마시고, 고기를 좋아하는 지인들과 한식당에 가도 자유롭게 콩고기 갈비를 시킬 날을 꿈꾼다. 일생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선택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게 '음식'인데, 그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것은 굉장히 슬픈 일임을 난 바나나우유를 보면서 느꼈다. 그래서 결론은 이거다. 나를 바나나우유 먹게 하라. 선택할 자유를 주라 주!


이 글을 보시는 빙 XX 바나나우유 관계자님, 락토프리 바나나우유 출시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