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뻬드로 빠라모>, 그리고 <백 년의 고독>을 읽고
①역사성과 환상성에 관해 논하시오.
1. 제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
세 작품 모두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서 역사성과 환상성이 돋보였다. <픽션들>에서 등장하는 공간은 상징과 비유의 대상이었다. 제시된 공간은 다른 곳을 표현하기 위한 임시 공간이었다. <바벨의 도서관>에선 우주를 도서관으로 표현했다. 소설 첫 부분에서 명시적으로 이를 밝혔다. 이어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도서관의 구조와 운영 방식을 소개했다. 육각형 진열실로 이뤄졌다는 등 일정한 법칙 아래 무작위로 구성되고 운영된다고 설명했다. <픽션들>의 공간은 현실 공간을 거울에 비춰 드러낸 공간이다. 표상 그대로 혹은 좌우반전으로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2. 무한의 굴레인 시공간
여기엔 역사 연표상 어디에 위치하느냔 물음이 뒤따른다. 시간이 단선적으로 흐르면서도 결국 동일한 사건 혹은 공간이 순행적으로 반복된다는 대답이었다. 과거에 있던 것이 당대에도 나타나고 미래에도 드러나겠지만, 이건 결국 과거에 있었던 것이기에 반복이란 것이다. 다만, 일정한 법칙에 따르면서도 무작위로 구성된다고 덧붙였다. 무한과 유한 모두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무한하지만 주기적이란 우주관이 현실의 물리적 시간과 차이를 보이는 데서 환상성을 보였다.
3. 삶-죽음 연결
<뻬드로 빠라모>에서 나타난 ‘꼬말라’란 공간은 존재 자체가 환상적이다. 유령의 세계는 현세에만 머무를 수 있는 개체에겐 상상의 영역일 뿐이다. 해당 공간은 시간의 확장인 셈이다. 사람이 죽으면 사고와 판단 혹은 독서가 이뤄질 수 없다는 걸 넘어선 것이다. 삶이 죽음과 이어져 연장되니 개인의 역사도 길어졌다. 물론 죽기 전인 과거를 회상한다는 이유에서 역행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삶과 죽음, 두 축을 분명하게 구분 지어 이야기가 전개됐기 때문에 이는 확장으로 보는 게 설득력 있다고 판단했다.
4. 평행 시공간
<백 년의 고독>은 ‘마콘도’란 새로운 공간을 현실 시간 속에 창조했다. 쓰인 역사에 새로운 역사를 덧대는 식이다. 새롭게 서술되는 걸 전면에 내세우지만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면 '없는 역사'다. 마술적 사실주의라 일컫는 표현 방식으로 환상성이 드러났다.
이 작품에선 시간이 두 차원으로 뒤틀렸다. 먼저, 시간의 병존이다. 현실 세계와 창조된 세계가 공존했다. 도입부나 작품 곳곳에서 현실의 어떤 공간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 게 둘의 시간이 평행하게 흐른다는 걸 암시했다. 다음은 시간의 역행이었다. 작품의 서술방식을 보면, 예언을 해석하는 데서 시작해 예언을 받은 것으로 끝났다. 시간상 역순행 구조다. 100년이란 시간 동안 축적된 가계를 맨 아랫사람이 맨 윗사람으로 거슬렀다. 시간이 수평적으로, 수직적으로 역행했다.
② 각 작품에서 인물이 느끼는 고독의 의미를 논하시오.
1. 제각기 다른 고독의 함의
세 작품 모두 고독이 등장하지만, 각각이 지닌 고독의 함의는 달랐다. <픽션들>은 시스템의 완전함을, <뻬드로 빠라모>에선 개인의 고독을, 그리고 <백 년의 고독>은 집단의 고독을 뜻했다. 이에 따라 공간 속 인간이 객체 혹은 주체로 다르게 나타났다. <픽션들>에선 인물이 객체로 나타났고 <뻬드로 빠라모>에선 주체로 섰다. 이와 달리 <백 년의 고독>은 객체였지만 주체의 가능성 역시 보였다. 이 작품에선 객체의 영역에서 몇 걸음 옮기면 경계선을 넘어 주체로 설 수 있다고 암시했다.
2. 구조적 종속
<픽션들> 중 <바벨의 도서관>에선 도서관에서 등장인물이 불을 밝히고 고독하단 걸 드러냈다. 이는 도서관의 법칙이 어떠한 요인에도 변화를 받지 않고 굳건하다는 걸 표현하려 쓴 것이다. 인간은 도서관이 반복되는 시간의 순환에 고독을 느끼는 것이다. 단단하게 자리 잡은 시스템에서 이에 영향을 받는 인간이 이를 조정할 수 없단 사실을 마주한다면, 처음 느끼는 감정은 분명 무력과 고독일 것이다.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이란 한계 때문이다. 이는 <바빌로니아 복권>에서도 나타났다. 하나의 추첨 결과가 다른 결과로 이어지는, 추첨이 무한히 반복되는 내용이었다. 회사의 계획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고독은 무한한 법칙의 일방성을 의미했다.
3. 인간이란 존재의 근원
<뻬드로 빠라모>에선 인간이라면 고독을 느낀단 의미였다. 죽음이란 주제 자체가 고독감을 주지만 그걸 뜻하는 건 아니었다. 죽을 땐 관 속에 혼자 남아야 한다는 등 고립된다는 느낌에서 받는 고독감을 부정하진 않지만, 적극 지지하는 해석도 아니다. 작품은 이를 넘어서 죽음의 공간으로 삶을 이었다. 결과는 고독의 연장이었다. 고독을 의미했던 죽음의 풍경이 삶과 교차하며 길어지고 풍성해졌지만 주체들이 겪는 건 고독이었다. 이는 죽음의 삶 속에서 각 개인에게 향했다. 삶이 고독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변수가 아닌 것이다. 이 작품은 인간 근원에 고독이 놓여있다는 걸 나타냈다.
4. 고립의 귀결 또는 한계
<백 년의 고독>에선 예언대로 됐다는 의미에서 운명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다고 인물은 느꼈다. 다만 <빼 드로 빠라모>와는 결이 달랐다. 잘 살펴보면, 예언이 예언대로 나타나게끔 인물들이 자처했다. 인물들 역시 태도를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달라지면 태도 역시 변할 수 있었다. <뻬드로 빠라모>가 인간 개인의 고독을 이야기한 반면, <백 년의 고독>은 집단의 고독을 말했다. 고독이 고독으로 이어지고 끝난 데엔 개인 간 특정 영향을 주고받았다. 후대에 이런 경향을, 집단이 공유하고 오래 지속된 하나의 양식으로, 문화로 불렀다. 이것이 ‘100년 동안 고독’이 제목이 된 배경이라 생각했다.
고독의 계승은 개인 간 유전 영향도 있겠지만, 환경과 개인 간 상호작용 결과가 주는 영향이 크다. 고립된 도시에서 인물들이 고독을 자처하지 않았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공간의 고립이 곧 인물의 고독을 낳지는 않는다. 이미 쓰인 역사는 만약을 가정하는 게 의미 없다고 혹자는 말한다. 허구적인 ‘마콘도’에선 이런 비판에 자유롭다. 누가 고독의 고리를 끊을지 작가는 작품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