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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숲 Aug 06. 2016

나는 기꺼이 좋아합니다.

결국, 다시, 또. 그러나 기쁘게.


나는 그때 흔쾌하지 않았어야 했다.



이것은 정말 개인적인 일이다. 동시에 굉장히 보편적인 일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소위 '끌린다'는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내 시야가 그 사람으로 채워지고 갑자기 시간이 느려지다 빨라지는 것을 경험하고, 가끔 명치 언저리에서 알 수 없는 위화감에 혹시나 배탈이 난 것은 아닐까 덜컥 걱정하게 하는. 바로 그 감정.



    좋아함. 나는 이것을 좋아함이라고 부른다. 아직 사랑을 알 만한 내공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히 사랑이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냉담한 종교인이 있는지도 확신하지 않는 신의 이름으로 제사를 올리는 기분이랄까. 일단은 각설하고,  그래서 이 좋아함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다들 이 난리 법석이란 말인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특징은 강렬하다는 것이 있겠다. 어떤 모습을 하고 찾아오든, 자의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함은 우리의 신경을 마비시켜버리기 충분하다. 누군가는 이것을 그저 뇌의 화학작용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것이 조금 특별한 화학작용이라고 믿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지구에 등장하고부터 이것이 이제껏 수없이 많은 창작의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나만 해도 지금 그놈의 마음 때문에, 누군가의 도발 때문에 글을 쓰고 있지 않나. 꼭 나처럼 창작에 이런 에너지를 쓰지 않더라도, 누구나의 삶에서 이것은 한편의 바랜 사진으로 차곡차곡 쌓일 만한 경험으로 남게 된다. 다들 하나씩 담아둔 이야기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어쨌건, 이것이 당신의 몸속에서 피어오를 때, 당신은 무시하거나 모른척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 좋아하는 감정은 그렇게도 독하다. 이것이 약물이라면 가장 독한 신경 자극제와 안정제 반열에 들지 않을까?


    더 살펴보자. 보통 좋아한다는 단어를 떠올리면, 좋은 면이 많이 떠오를 것이다. 아이들이 숱하게 떠들고 다니는 "철수가 영희 좋아한대요~"류의 놀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생각하기만 해도 간질거리면서 웃음이 배어 나오는 단어다. 기억이 닿을 때부터 시작하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접은 종이학을 누군가에게 건넨 추억이라던지, 좀 더 커서는 그 애의 교복 자락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 내 가슴도 날갯짓을 하곤 했던 일들이 모두 '좋아함'의 짓이고 흔히들 가지는 이미지이다. 이렇게 장미가시가 찌르듯 따끔하지만 싫지 않게 파고드는 경험들은 오랫동안 남아 머릿속에서 이따금씩 재생되곤 한다. 왠지 회상하면 오렌지 또는 핑크빛 필터가 덮여 괜스레 달달하다.


    이렇게, 낭만의 절정을 선사하며 롤리팝 하나를 크게 베어 문 것처럼 달콤한 쾌락을 허락하는 '선한 면' 뒤에는 예상치 못한 잔인함이 도사리고 있다. 예상을 빗겨나가지 않는 불길함, 다른 말로 숲을 헤매다 찾은 알록달록한 의문의 버섯 같은 녀석이라고 할까. 요 감정으로 인해서 눈물 좀 뺀 피해자도 적잖은데, 그들 중 대부분은 앞서 말했던 낭만 단계의 전이나 후에 이 사단을 겪게 된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마음이 같지 않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낭만이 아닌 고문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 또한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의 마음이 같지 않다. 즉, 좋아함이라는 감정이 아무리 소리치고 떼를 써도 내가 갈증하는 그 사람을 곁에 둘 수 없을 때 말이다. 좋아하는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기분이 들거나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는 생각이 들 때, 가슴에 둥지를 틀었던 새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차갑게 굳어간다. 더 잔인하게는, 충분한 애정전선을 유지하다가도 한 사람의 변심으로 달리는 감정의 열차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는 경우가 있다. 빈 열차칸에서 상대의 흔적을 더듬거리며 시들어가는 기분은 딱히 경험하고 싶지 않을 정도랄까. 또 그 밖에도, 헤어지고 나서의 괴로움에 시달리는 흔한 '후폭풍'등이 이 감정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낭만과 괴로움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경험으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이 좋아함이라는 알약의 두 효용과 부작용은 필연적으로 함께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좋아함이라는 감정은 굉장히 강렬하고, 기억에 오랫동안 남으며, 사람의 삶을 바꿔놓을 정도로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할 수 있다. 심지어 이것은 사람을 황홀하게도 하지만 비참하고 죽을 것 같은 회의와 갈증에 시달리게도 할 수 있다. 아니, 황홀과 고통을 둘 다 경험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만들어진 감정이다. 모든 연애에는-심지어 때때로 결혼에도!-끝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플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서로에게 뛰어든다. 이처럼 좋아함이라는 감정은 사람을 말 그대로 '미치게 만든다'. 좋게 미치건, 나쁘게 미치건 사람을 제대로, 효율적이고 이성적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건 충분히 이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것을 경험해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자기 고문' 끝에 또다시 이 모순적이고 불안정한 감정을 찾는다. 그들은 양날의 검을 기꺼이 품속에 껴안아 피를 흘리면서도 황홀경에 젖어 판단은 유보한 채 우두커니 서있곤 한다.


    나도 그렇다. 아니, 그랬다.

한번 이 달콤한 쓰라림을 경험하고 난 이후,  내 경우엔 늘 이 감정의 시작이 두려웠다. 이 양면적인 감정이 언젠가 날 아프게 만들 것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경계하고, 아닌 척하고, 부정하는 것에 신경을 썼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매번 의식할 새도 없이 이성이 마비되어 버리고 말았다. (완벽한 헛똑똑이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지지 않는가.) 그리고 점점 서로에게 녹아들어 가기 시작하고, 그'낭만'에 푹 잠겨 정신 못 차리다가 한참 한참 뒤에서야, 그가 마음을 내어달라고 부탁할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던 것을, 후회했다. 분명히 내가 좋아서, 내 마음을 활짝 열고 버선발로 달려 나간 것은 나인데도, 그래도. 나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싶은 이기적인 인간이기에, 늘 후회했다. 늘. 그리고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런, 무모하고 얼빠진 결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늘.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게 아프고도 다시 일어서서 달려들 만큼 매력적인 감정인데, 또 그렇다고 내 맘대로 켜고 끄고 자시고 할 수도 없게 만드는, 얄미운 감정. 게다가 혼자 할 수도 없다! 대상이 꼭 필요한, 굉장히 번거로운 일을 만드는 감정이다.
다시,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너는 그때 흔쾌하였어도 괜찮다.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할 수 있는, 그런 이성적인 상태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진짜 감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럴 때는 그냥 정공법이다. 그냥 견디는 것. 좋아하는 마음이 결국 나를 위험하게 만들 것이라고 애써 부정하거나 피하려고 들지 않는 것. 실컷 서로를 좋아하고 남는 눈물과 아픔을 외면하고 괜찮은 척하지 않는 것. 나에게 걸어 들어온 감정이었으니, 그대로 걸어나가게 해 주는 태도가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누구라도 언제라도 무미건조한 내 삶에 들어온 사람이고 시간이라면 그 모든 순간을 적극적으로 만끽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아픔을 빨리 잊는 길이라고들 한다.
... 뭇사람들이 말이다.


    그렇다. 이것은 굉장히 보편적인 일이다.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다. 한 사람에게 특별한 끌림을 느끼게 되는 것. 그가 내 세계의 중심으로 옮겨오는 과정.

그 과정 중에 조금 많이 들뜨고 긴장하고, 기대하고 또 실망하며, 기뻐하고 동시에 아파하는 이 묘한 경험을 한 마디로 단언하지 말자. 마음을 던진 상대와 함께 겪는 감정의 풍파라면, 온몸을 열어젖혀 그 폭풍을 기꺼이 맞아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이 감정을 견디는 나와 그에게 충실한 해답이 된다.

흔쾌히 가진 감정을 모두 써보이는 것, 자신의 카드가 떨어질 때까지 게임을 계속해 보는 것. 끝에 무엇이 있든 한 번쯤은, 아니 계속 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다른 사람의 세계에 닿을 수 있는, 내 세계를 기꺼이 내보일 수 있는 가장 특이한 방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늘, 매번, 언제라도, 새롭게 설레고 아파오는 이 '좋아함'에 닿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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