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엔 왜 이리 진심을 털어놓는 게 서툴었는지
우리는 모두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해맑게 세상을 그대로 보던 아이와 사회와 주변에 적응하는 한 뼘 자란 청소년의 중간 지점.
우리는 그대로 아이일 수 없고 그렇다고 아직 세상에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그 시절에 그 모든 게 약점이 된다. 내가 가진 모든 작은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고 만다.
저주받았다.
그땐 나란 존재가 전부다. 밖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균열이 있는 나 자신은 견디기 힘들다.
이내 곧 누군가에게 들킬 것만 같다.
어른이 되면 아무렇지 않을 일이 그럴 수도 있는 일이 한순간도 잊을 수 없는 끔찍한 악몽처럼 느껴지는 시절.
어른들은 알 수 없는 일이 많이 벌어진다. 아무 일도 없지 않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는 척한다.
배척. 선이는 은따다. 그 시절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는 건 그 어떤 괴로움보다 크다.
그래도 선이는 웃어본다. 초조하고 입술을 앙 물어보지만 웃어본다.
선이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니 마음이 아파도 기다린다.
그런 선이에게 여름방학이 왔다. 숨 돌릴 수 있는 시간 자신을 규정하는 시선들에 벗어나는 휴식기
문 앞에서 우연히 전학생 지아를 만난다. 그대로 그냥 가는 지아를 선이가 부른다.
-아 저기. 너 이름이 모야?
-나 한지아. 너 이름이 모야?
-나? 이선. 안녕
-안녕~
그제야 이름을 들었다. 그제야 선이라는 존재는 이 영화에 태어났다.
그 시절의 여자 아이들은 참 쉽게 친해진다.
선이가 만든 팔찌를 칭찬하고 관심 있는 남자 이야기를 하고 미래를 말한다.
눈치를 보다가도 돈이 없다고 시무룩하지만 방방을 타면 자연스럽게 곧 돌아오는 회복탄력성이 강한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선이는 두렵다. 들킬까 봐 외톨이인 자신의 처지가 들켜 다시 혼자가 될까 봐.
지아도 선이를 떠날까 봐
어쩌면 그 시절 우리는 이제 곧 사회에 나가 어른이 되면 매일 나와 너를 구분하며 단절된 일상을 살아내지 않을 재간이 없기에 조금도 분리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서로의 일상을 파고들고 모든 걸 공유하고 너와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마치 한 몸처럼
원래부터 한 존재인 것처럼 우리가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맞닿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 우리는 단짝이 필요하다. 모든 게 되어줄 나보다 사랑할 수 있는 단짝
같이 있으면 나의 부족함이 생각나지 않는 단짝
그 시절 우리는 강하지 못해 쉽게 흔들리고 조금의 바람에도 균열이 생긴다.
내가 전부면서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기 마련이고 나의 주관이란 건 없다.
나밖에 안 보이는 시야를 가진 주제에 왜 이리 남의 말은 잘 들리고 중요해질까.
왜 나보단 타인의 평판이 중요할까.
단짝 일 때는 아무렇지 않았던 둘의 차이가 보인다.
별 거 아닌 계기로 우린 틀어진다.
오이 김밥보단 공장제 바나나킥에 손이 간다.
선풍기 없이도 하나도 안 덥던 그 집이 이제는 덥다.
자꾸만 어긋난다.
핸드폰도 없고 학원도 못 다니는 선이가 불편하다.
-괜찮아. 얘기해.
얘기할 수 없다. 온몸으로 거부하면서도 아닌 척한다. 진짜 이유는 말할 수 없다.
나의 결핍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면 차라리 상처 주는 게 낫다.
터놓을 수도 없다.
-그래도 오해는 풀고 가야지.
-너나 그런 식으로 오해 풀지 마. 진짜 기분 나빠. 그러니까 네가 친구가 없는 거야. 알아?
차라리 공격하고 깔아뭉개야 초라한 내 모습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
아이인 윤이는 처음 본 지아 누나에도 앵겨붙고 학원 가지 말라고도 붙잡는다. 혼나도 웃는다. 때려도 웃는다.
마음이 약할수록 남을 괴롭힌다. 자신이 싫을 딱 그만큼 남을 괴롭힌다.
봉숭아물 대신 매니큐어를 바른다.
우리는 왜 그토록 진심을 풀어내는 게 서툴렀을까?
그냥 사랑해줘. 같이 놀자. 한마디면 다 상관없어질 만큼 서로를 원하면서
-윤아 너 왜 계속 연오랑 놀아? 아니 연오가 계속 너 다치게 하잖아. 맨날 상처 내고 때리고 장난도 너무 심하고.
-이번에 나도 같이 때려줬는데.
-그래
-연오가 나 때려서 나도 쫓아가서 연오 확 때렸어.
-그래서?
-그래서? 같이 놀았어.
-놀았다고? 야. 이윤 너 바보야?
-그럼 어떡해?
-다시 때렸어야지.
-또? 그럼 언제 놀아?
-응?
-연오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오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그냥 놀고 싶은데.
선이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간 비밀일기 같은 영화.
음악도 많지 않고 일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이 사실적이다.
많이 보던 우리들의 이야기
아역의 연기가 엄청 인상 깊다. 이건 연기가 아니다. 생활 그 자체다.
주책이다
파스텔빛 청량한 여름 영화인데 섬세하고 결이 고아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선이도 지아도 보라도 한 번씩 꽉꽉 안아주고 싶다. 분명 그들은 나를 밀쳐내겠지만
다시 윤이처럼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건 이미 불가능하지만 같이 놀고 싶으면 그냥 같이 놀면 좋을 텐데.
언젠간 지아와 선이가 둘이 함께 바다를 보러 갔기를.
파스텔 톤의 처절하고 아름다운 감정이 꾸밈없이 들어가 있는 영화. 우리들
여름마다 생각날 것 같다. 그리고 봉숭아 물을 들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