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나스타샤'를 보고
옛날 옛적 러시아 왕국에 아나스타샤란 마지막 공주가 살았어요. 어느 날 성격 나쁜 마법사가 나타나서 그들의 가문에게 저주를 내리고 왕국을 불타 없어졌어요. 할머니와 도망치던 아나스타샤는 그만 난리통에 할머니의 손을 놓치고 그렇게 혼자가 되어 고아원을 전전하며 살았어요. 자신이 아나스타샤라는 사실도 잊은 채.
가짜들은 말이야, 진짜로 위장하면 얻게 되는 잿밥에 관심이 많아. 어차피 다 알잖아. 짜고 치는 게임. 이득이 탐나서 연기를 하는 걸 누가 손가락질해. 누가누가 제일 진짜처럼 보이나 겨루는 거야. 그래서 승자가 이득을 독식해도 아무도 비난할 수 없다고. 세상이 그런 걸. 어차피 진짜는 없고. 진짜를 찾는 사람은 있으니. 바보들을 잘 이용하면 돈 벌 수 있는 걸. 그 쉬운 걸 안 하나? 진짜가 되는 것보다는 진짜로 둔갑하는 법이 훨씬 쉽다고. 그래서 세상은 가짜와 진짜로 마구 뒤섞인 거야. 아니 가짜가 판을 치고 진짜로 대체되어버렸어.
난 내가 누군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진짜 아나스탸샤도 자신이 진짜인 줄 몰라. 막상 진짜 아나스탸샤는 자신이 공주인 것에 관심이 없어. 그녀는 자신이 누군지 알고 싶을 뿐이야. 가족이 찾고 싶을 뿐이야. 그녀는 그녀가 되고 싶을 뿐이야.
표지를 따라가. 아나스타샤, 그쪽이 아니야. 온 세상이 아나스타샤에게 말하네. 진짜가 진짜가 되고 싶다면 전 우주가 도와 마법을 부려. 신비한 강아지를 만나고, 갈 곳은 인도해 줄 안내자를 만나고, 진짜를 확인해 줄 증인을 만난다네. 진짜는 잘못된 길을 들어서도 잘못된 길로 가지 않아.
진짜를 앞에 두고도 사람들은 몰랐어. 아나스타샤가 제법 진짜 같다며 감탄을 했지. 알게 뭐야. 거래만 이뤄지면 돼.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치 않아. 진짜처럼 보이는 게 중요하지. 진짜도 가짜 취급을 받네. 진짜도 잘한다고 칭찬을 받네. 알게 뭐야. 그녀는 가족을 만날지도 모르니 뭐가 되든 좋을 뿐이지.
그러나 거기엔 사람이 있네. 모험을 떠나고 사고가 생기고 일이 생기면 관계가 생기고 마음을 나누게 돼. 서로를 보고 나서도 서로를 알고 나서도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없잖아. 목적은 사라지고 존재가 남게 돼. 운명은 얄궂지. 유일하게 진짜를 알아볼 수 있는 증인 드미트리는, 유일하게 아나스타샤가 가짜이길 바랐어.
춤을 추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솔직해봐. 드미트리. 아나스타샤를 찾고 싶었던 거잖아. 돈은 핑계잖아. 아나스타샤를 기다렸던 거잖아. 오래전부터 아나스타샤를 봤잖아. 아니, 드미트리 왕국에서 그 작은 문을 열어주었을 때부터 인연은 정해져 있었어. 아나스타샤를 알아주고 사랑해줄 당신의 운명이.
흔한 클리셰지. 그러나 진실은 뻔하다고. 찾던 걸 목전에 앞두고 포기하는 거. 진짜 아나스타샤가 도착하기 바로 전까지 여왕은 지쳐버렸어. 가짜들의 진짜 놀음이 지긋지긋해졌지. 기회를 주기도 싫었어. 설사 진짜를 찾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평생을 공들여 바라던 소원을 눈앞에서 놓치다니. 진짜를 앞에 두고도 거들떠도 안 보네. 이젠 여왕도 진짜를 확신하지 못해.
누구보다 진짜 아나스타샤가 진짜이길 바라지 않는 드미트리는 아나스타샤를 확인해줄 유일한 사람이야. 온갖 면박을 당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간신히 여왕을 만나. 듣지 않는 여왕에게 작은 오르골을 내밀어. 그게 드미트리의 역할이야.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돈도 필요 없어. 설사 그녀를 잃는다 해도 사랑한다면 그리 해야 해. 당신이 진짜 찾는 사람은 그녀가 맞다고. 피를 철철 흘리더라도 그녀가 그녀가 되게 해야 해.
오르골의 음악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 가족을 찾은 기쁨은 만개해. 서로를 껴안고 눈물 흘리지. 이제야 진짜는 진짜가 됐어. 아나스타샤는 아나스타샤가 됐어. 아나스타샤는 진짜 공주였어. 그렇다면 해피엔딩인 거야?
여왕인 할머니는 물어. 정말 괜찮겠냐고?
다시 한번 더 물어. 이대로 괜찮겠냐고?
너는 단지 너를 알게 되면 좋을 뿐이라고 말했지, 아나스타샤. 너는 가족을 찾고 너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면 완성이라 생각했지. 그러나 그게 아니었어. 진짜가 되는 건 공주가 되는 게 아니야. 진짜가 되는 건 아나스타샤가 되는 거야. 아나스타샤는 모든 시간에 존재했어. 아나스탸샤는 길을 따라왔고 많은 일이 있었지. 시간에 의해 인연에 의해 드미트리를 사랑해. 그와 함께 존재하고 싶어 해. 그게 네가 진정 원하는 거라면, 망설일 거 없어. 마음을 따라가. 네가 찾은 건 사랑이야, 아나스타샤. 그건 소중하고 희귀한 마음이야. 보이지도 쳐주지도 않는 사랑을 선택한 바보 아나스타샤, 그래서 넌 진짜야.
아니 완벽한 시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