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보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일단 배가고파 민가인지 식당 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밥과 생선구이 하나를 받아 나눠먹었다. 숟가락이 없었다. 너무 배가 고파 손으로 집어먹었다. 일단 배가고파 민가인지 식당 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밥과 생선구이 하나를 받아 나눠먹었다. 숟가락이 없었다. 너무 배가 고파 손으로 집어먹었다.
도대체 어쩌다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단 한순간이라도 지루하다면 ‘그리스’가 아니다!'
뮤지컬 그리스의 표어처럼 그와 함께한 시간은 '그리스'보다도 더욱 다채로웠다.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정말 단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는 하지 말라는 행동만 골라 하는 개구쟁이다. 남들이 정해놓은 규칙 같은 건 가뿐히 무시했다. 하고 싶으면 다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행은 수동적이고 얌전한 척 하나 사실 마음 한 구석에 자유로운 영혼을 품고 어디에도 얽매이기 싫던 나의 욕망을 채워주기 충분했다.
우리의 하루는 보통 이렇다. 만나면 그가 내게 행선지를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오늘은 바다에 갈 거야."
"응? 나 수영복 안 가져왔는데?"
"쿠바 사람들은 수영복 같은 건 안 입어. 걱정하지 마."
의심스러운 눈으로 일단 바다에 도착했다. 그는 훌렁훌렁 옷을 벗었고 팬티만 입은 상태가 된다.
"뭐해? 수영하자!"
"어......... 아니야. 난 괜찮아."
"무슨 소리야. 바다에 왔으면 수영이지."
"난 수영 못 하는데?"
"그래? 내가 가르쳐줄게. 자 빨리빨리~"
그의 성화에 못 이겨 입고 있던 반팔 반바지를 벗고 난 속옷만 걸친 상태가 된다. 그의 말과는 달리 쿠바 사람들은 멀쩡히 수영복을 잘 챙겨 입고 있다. 사기꾼... 항변할 틈도 없이 스파르타 훈련에 돌입하는 조교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이끈다. 바다는 아직 내 목까지 차오르는 높이다. 파도는 제법 거셌다. 그는 '잘 봐!' 하더니 시범을 보인다. 별로 도움은 안 된다.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봤으나 돌아오는 그의 답은 냉정하다.
"수영은 실전이야! 다 할 수 있다고."
약 30분간 난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소금을 엄청 먹는다. '흐업! 못하겠-... ' 나의 항변 따위는 파도에 밀려 가뿐히 사라진다. 그는 무한 반복 훈련에 돌입한다. 어리광은 통하지 않는다. 될 때까지 하는 거다. 뭐 너한테 로맨스나 이런 걸 기대한 적 없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 결국 못 참고 소리친다.
"으악! 몰라 나 안 해! 죽을 것 같아!"
"그래? 그럼 난 수영 더 하다 갈게."
참으로 쿨하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깊은 바닷속으로 유유히 헤엄쳐 나간다. 나는 정신을 반쯤 잃은 채 젖은 몸으로 작은 돌들이 난잡하게 섞인 해변에 누웠다. 괜히 카리브해가 아름다운 게 아니다. 아무런 부대시설 없이 그냥 햇빛에 비친 코발트색 바다가 거칠지만 아름답다. 사람들은 익숙한 일상을 보내 듯 여유로운 분위기로 한가한 시간을 완성한다.
'젠장! 바다도 예쁘고 기분도 좋잖아!'
물론 집에 가겠다는 나를 억지로 끌고 이상한 로컬 바에 굳이 데리고 들어가 대판 싸웠다. 춤추고 있는 그를 버리고 홀로 버스를 타러 가니 못 이긴 척 날 따라오는 그.
"너 왜 따라와? 너 돈 없어서 그렇지? 네가 아까 거스름돈 챙긴 거 다 봤거든?"
확실히 그가 아니었으면 존재도 몰랐을, 이름 모를 장소도 여러 군데 놀러 갔다.
"폭포 좋아해? 난 좋아해. 오늘은 폭포 보러 가자."
언제 내 대답이 필요했을까. 트럭을 버스로 개조한 로컬버스를 타고 덜컹거리며 정체도 모르는 산자락에 도착했다. 일단 배가 고파 민가 인지 식당 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밥과 생선구이 하나를 받아 나눠먹었다. 숟가락이 없었다. 너무 배가 고파 손으로 집어 먹었다.
배가 고픈 동네 개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미안하지만 우리 둘이 먹기도 양이 부족했다. 우리는 밥 몇 덩어리를 던져 주긴 했지만 끝내 생선을 주진 않았다. 그가 장난으로 뼛조각을 덩치가 작은 개에게 던졌다. 개는 약이 올랐는지 으르렁거리고 왈왈 짖으며 나를 따라오는 게 아닌가. 나는 작은 개를 무서워한다. 따라오면서 성난 표정으로 짖는 개는 더더욱 무섭다. 그는 자지러지듯이 웃는다. 도와주긴커녕 넋 놓고 구경했다. 다행히 개는 집이 너무 멀어졌는지 1 km쯤 지나자 나를 포기했다.
아무리 봐도 길이 아닌 것 같은데 사람도 없고? 불길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갔다. 참고로 나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 놈은 단화를 신고 있었다. 마침내 30분 넘게 등산한 끝에 도착한 그 곳은... 폭포가 아니다. 물이 없는걸? 바위에 둘러 쌓인 계곡이었다.
"이상하다. 원래 폭포가 있어. 요새 비가 안 와서 그런가 봐."
그곳에는 우리보다 조금 더 일찍 온 연인이 하나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순간 그들의 로맨틱함은 위기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파리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찰싹 달라붙어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일부러 그곳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이왕 온 김에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난 더 올라갈래."
"여기 올라갈 데가 없는 걸?"
"길이 없다고 올라가지 못하는 건 아니야. 난 남들보다 높이 올라가고 싶어."
그는 맨발로 바위틈 사이 삐죽 튀어나온 나무나 풀 데기를 지렛대 삼아 길이 없는 바위를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를 따라갔다. 뭔가 질 수 없다는 마음 때문일 수도 있고 단순히 재밌어 보여서 일지도 모른다. 중간에 미끄러져서 비명횡사할 뻔했는데 정말로 정상까지 올라왔다.
숨을 거칠게 내뱉자 그가 말한다.
"운동부족 아니야? 너 운동이 부족해 보여."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밑을 내려다본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아까 봤던 그 커플이 개미만 하게 보였다. 내 카메라에 그 전경이 전부 들어오진 않았지만 확실히 위에서 보는 풍경은 달랐다.
"넌 꼭 왜 하지 말라는 짓만 해?"
"그냥, 재밌잖아! 어릴 때부터 이모나 고모들이 사촌들에게 신신당부했지. 나랑 놀지 말라고. 나랑 놀고 나면 나는 멀쩡한데 걔들은 팔다리가 하나씩 부러지곤 했거든.'
... 나 오늘 멀쩡히 집에 돌아갈 수 있겠지? 내려가는 길은 올라오는 길보다 몇 배 힘들었지만, 다행히 그 날은 멀쩡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무리 고향이라지만 그는 그 동네 사람을 다 아는 것 같았다. 아니 모르는 사람도 '라포 단계'는 가볍게 뛰어넘어 친구로 만드는 친화력이 대단한 남자였다.
온통 새하얀 이름 모를 비석이 가득한 묘지를 간 날이었다. 자전거 택시를 타고 갔다. 자전거 택시를 모는 분은 아무리 젊게 봐야 중년 혹은 젊은 할아버지 정도의 나이였는데 빼빼 마르셨다. 알레는 그와 이야기하더니 얘기가 잘 되었는지 뒤에 타라는 표시를 한다.
"알레. 우리 둘이 타면 너무 무겁지 않을까?"
"괜찮아.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놀랍게도 아저씨는 마른 학다리로 우리를 그곳까지 무사히 데려가 주셨고 나는 너무나 미안해졌다. 혼자 찬찬히 온통 새하얀 쿠바 무덤가를 구경했다. 그는 저만치 앞서 자전거 택시 아저씨와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군인들의 교대식까지 본 후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는 아저씨와 친해졌는지 어깨동무를 하고 돌아온다.
"Stella! 집까진 우리 둘이 운전하는 거야."
아저씨와 나를 뒷자리에 태운 채 알레가 먼저 시동을 걸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 택시를 끌고 갔다. 10분 정도 지나자 힘이 든 지 내게 말한다.
"네 차례야."
"...나보고 끌라고? 진짜?"
"응 해봐. 재밌어."
"난 몰라. 책임 못 진다고!"
자전거 택시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차며 뒷자리에 앉지 않았지만 알레는 주인처럼 당당히 뒷자리에 착석한다. 난 정말 끌어봐도 될 지 눈으로 아저씨게 묻자 고개를 끄덕이신다. 생각보다 자전거 택시 운전은 매우 어려웠다. 자꾸만 중심을 잃었다.
"오른쪽! 오른쪽!"
다급하게 외치는 그의 말과는 달리 핸들은 이미 내 손을 떠났다. 난 왼쪽 벽에 쿵! 하고 부딪혔다. 그가 별로 걱정되지 않았지만, 자전거가 멀쩡한지 걱정되었다. 그는 웃으며 놀렸다.
"Stella! 우릴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그러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잘하라고!"
두 번이나 벽에 박았지만 자전거는 박살 나지 않았고 아저씨의 안전한 운전덕분에 무사히 시내로 돌아왔다. 셋이서 살아남은 기념으로 로컬 맥주 바에서 한 잔 했다. 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자 그는 '자전거 택시 몰면 안 돼! 사람 여럿 죽인다.' 하며 계속 놀렸다. 해가 지고 노을이 지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자주 가던 단골 식당이 있다. 쿠바 가정식 식당인데 다른 모든 곳이 그러하듯 가정집을 개조해 작게 장사를 한다. 매일 식재료에 따라 조금씩 요리가 바뀐다. 메인 요리는 강황 밥, 고기류, 양배추 혹은 토마토 등 채소가 올려져 푸짐하게 한 접시 나온다. 우리는 '산티아고 데 쿠바'에 머무는 동안 대충 한 끼를 때우고 한 끼는 꼭 그 식당에서 해결했다.
어느 날 알레는 조용히 한 접시 비우고 있는 내게 넌지시 말한다.
"넌 참 많이 먹어."
"뭐 불만이야?"
"아니. 그렇지만 너처럼 많이 먹는 여자는 처음 봐. 넌 돼지고기를 좋아하나 봐."
"응. 돼지고기 맛있잖아?"
"돼지고기는 더러워."
"뭐? 더럽다고?"
"응. 난 돼지고기는 안 먹어."
"그럼 내가 다 먹을게. 돼지 고기. "
일단 쿠바에서 피곤한 일이 많았고 언제나 음식을 맛있게 먹기는 했다. 남기지 않고 다 먹긴 했지만 결코 그 양은 많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보단 내가 좀 더 많이 먹는 것 같기도 하다. 할 말이 없네. 내가 많이 먹는 게 아니야. 네가 적게 먹는 거지!!
"그래, 나 돼지다. 난 Flan 먹을 거야. 그래서 넌 안 먹어?"
"난 두 개 먹을래."
식성은 달라도 통하는 게 있었다. Flan! 우리는 매일 Flan을 먹었다. Flan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Flan은 계란으로 만든 푸딩 같은 식감에 달짝지근한 캐러멜 소스가 올라가 있는 간식이다. 앉은자리에서 3개 이상 뚝딱 할 수 있었지만 돈이 부족해 한 두개로 만족했다. Flan은 쿠바다. 특히 그 단골집은 Flan이 환상적이었다. Flan은 우리 둘을 이어주는 소울푸드이자 갈등의 해결점이었다. 지금도 Flan이 그립다.
그렇게 이곳저곳 그와 쏘다니고 밥을 함께 먹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들었나 보다. 그의 거칠고 이상스러운 방식에 점점 익숙해졌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약속하지 않고도 당연히 그를 만나러 갔다. 원래 나의 산티아고데쿠바 일정은 5일뿐이었다.
3일째 되는 날 그가 말했다.
"네가 다른 곳에 간다면 상관 안 해. 그렇지만 '산티아고 데 쿠바'에 있는 동안은 나만 만나.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널 보면 죽여 버릴 거야."
5일째 되는 날 그가 말했다.
"여기 더 있다 가! 산티아고데쿠바가 제일 좋아!"
10일쯤 지나자 나는 이제 정말 떠냐야 했고 그가 말했다.
"같이 가자. 쿠바 밖으로 나가면 어쩔 수 없지만 '쿠바'에 있는 동안 같이 있자."
그렇게 그와 함께있는 시간은 3일이 5일이 되고, 5일이 10일이 되고, 10일이 "쿠바에 있는 동안"으로 확장해 나간다. 그렇게 그가 나를, 나도 그를 점점 좋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