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의 카르마

살얼음을 걸어도 우리가 또 싸운다해도 다시 또 너를 만난다.

by 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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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주 만에 다시 돌아온 아바나에 비가 내렸다. 불길했다. 마치 하늘은 우리를 서로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듯 나의 계획을 방해했다. 아바나로 돌아오기 전 나는 몇 번이나 강조했다.


"나 아바나에서는 원래 묵던 한국인 숙소에서 묵을 거야."

"알겠어. 난 친구 집에서 지내면 돼."


그 당시 호아끼나 숙소는 인당 10 CUC만 내면 도미토리형 숙소에서 하루를 묵을 수 있었다. (한국과 일본 여행객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숙소다) 이제 정말 돈이 없기도 했지만 알레랑 같이 있는 게 지겨웠다. 숙소를 핑계로 좀 떨어지고 싶었다.


그런데 숙소가 만실이었다. 보통은 숙소가 만실이라도 호아끼나 아주머니가 주변 숙소를 소개해주곤 하셨는데 하필 아주머니가 부재중이었으며 3일 후에나 돌아오실 거라고 젊은 남자가 말했다. 비는 점점 거세진다. 분명 트리니나드는 따뜻했건만 아바나의 겨울은 몹시 추웠다. 주변 'Casa'표시가 된 숙소 문을 두드려봤지만, 너무 비쌌다. 피곤이 몰려왔다.


"어쩔 수 없네. 나를 따라와."

"내가 졌다. 너에게서 좀 벗어나 보려고 했는데."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오비스포 거리를 지나 구시가지의 아주 낡은 빌딩 옥상으로 올라갔다. 뒤를 빠르게 따라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곳엔 옥탑방이 있었다. 잡동사니가 몹시 많았고 귀엽고 수줍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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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그 곳은 호세라는 친구의 집이었다. 아바나에 사는 동안 거기서 같이 지냈다는데 그 집에 방이라고는 단 하나뿐이어서 나는 의아했다. 그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그 호세라는 청년은 피부가 하얗고 키는 제법 컸으며 무언가 껄렁껄렁한 인상을 주었다. 알레는 그에게 사정 설명을 했고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그는 하루 6 CUC을 받고 자기 방을 빌려주기로 했는데 몹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달리 선택권이 없이 묵게 된 그 방은 아주 더러운 매트와 이불이 놓여있고 화장실이 방 안에 문이 없이 존재했다. 변기는 뚜껑도 앉는 부분도 없고 물도 내려가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곰팡이가 슨 아주 차가운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순간 거부반응이 들었다. 호아끼나 숙소가 그리웠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고 좋게 생각하면그나마 알레가 편히 잘 수 있게 된 거니 그냥 알겠다고 했다. 약 7일 치의 숙소비를 선급으로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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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대신 벽에 구멍이 뚫려있었고 얇은 커튼으로 구멍이 덮여 있었다. 구멍 사이로 보이는 아바나의 전경은 끝내주게 멋졌다. 다음 날 거짓말처럼 하늘은 맑아졌고 옥상 전경에서 보는 아바나는 7일 치의 불편함만큼 환상적이었다. 알레는 그 빌딩 옥상이 사진사들에게 꽤 유명한 촬영장소라고 말했다. 물론, 그곳에서 내가 지내는 건 불법이었다.


수도시설이 밖에 있었는데 내가 나갔다가 누가 보면 큰일 나니 알레가 손수 물도 떠다 주셨다. 건물 밖으로 나갈 때면 첩보작전을 수행하듯 알레가 망을 보고 후다다다다다다다다닥- 숨도 안 쉬고 한 번에 뛰어 내려갔다. 건물로 들어가기 전 역시 망을 보다가 사람이 없을 때 한 명만 먼저, 그리고 5분 후에 나머지 사람이 들어갔다.


그렇게 살얼음 위를 걷는 아바나 생활이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아바나 외부 환경은 우리의 싸움을 멈추게 했다. 거리를 걸을 때 알레는 아무 말 없이 차분했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경찰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고, 경찰을 발견하면 자연스럽게 샛길로 빠지곤 했다. 알레는 아바나에서 추방당한 적력이 있고 한 번 더 걸리면 진짜 감옥에 갈지도 몰랐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는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 앞뒤로 다녔다. 아바나에서는 여행객인 척 위장을 하기 위해 알레가 목에 내 사진기를 걸고 나와 연인인 척 팔짱을 끼고 다닐 수 밖에 없었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선 안 됐다. 돈도 없었지만, 박물관도 관광지도 갈 수 없었다. 그냥 조용히 큰 길이나 경찰이 많이 배치되지 않는 곳 위주로 찾아다녔다. 언성을 높이며 싸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외부의 적이 있으니 최대한 협조했고 알레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매일 밤 알레는 숙소에 도착해 힘 없이 쓰러져 자곤 했다. 알레는 예민해졌고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곤 했다. 내가 알던 그가 맞나 싶었다.


"알레, 이렇게 힘든 일인데 아바나에 왜 왔어?"

"너랑 같이 있고 싶으니까 왔지."

"같이 있으면 맨날 싸우는데, 뭐가 좋다고."

"나도 몰라. 너 혼자 아바나로 보낼 수 없었어."


그의 진심은 뭘까? 잘 모르겠다. 그동안 싸웠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내 머리를 스친다. 다른 여자들이랑 노닥거렸던 수많은 기억과 서로 모욕하던 나날들 그러나 역시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다면 분명 그는 여기 없었을 것이다. 그의 희생이 만든 시간이었다.



어느 아침 거리에 열린 미술, 예술 작품과 중고 서적 시장들을 구경한 후 벤치에 앉아 대화했다.


"알레, 너 '카르마'라는 말 알아?"

"아니. 그게 뭐야?"

"불교 용어인데 뭐라 설명해야 할까... 과거 내가 잘못한 일 때문에 지금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 이해할까? 난 널 만나면서 이전에 만났던 모든 착한 남자들에게 속죄하고 있어. 내가 그동안 그들에게 얼마나 상처를 줬던 건지 깨닫고 있어. 그 속죄의 의미로 너를 만난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알레 너는 나의 '카르마'야. 그래서 널 이길 수가 없다. 그냥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카르마'란 단어를 퍽 맘에 들어했다. 내가 화를 낼 때쯤이 되면 '어어! 나는 너의 카르마~ 넌 받아들여.'라고 역으로 써먹곤 했다. 나의 카르마는 쿠바에서 마무리한다고 그때마다 주먹을 꽉 쥐고 결심했다.


알레는 그동안 내게 사진을 찍어달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풍경 사진을 찍을 때 자기를 찍는다고 오해를 하고 내게 항의하곤 했다. 아니 찍을 생각도 없는데 왜 이렇게 나를 못 믿지. 그는 모든 개인정보에 민감했다. 세계 어딘가 자기 사진이 허락도 없이 돌아다니는 걸 견딜 수 없어 했고, 관광객과 만나고 있다는 증거를 특히 걱정했다. 내가 개인 블로그나 SNS는 쿠바 정부가 관심도 없을 거라고 말해보았지만, 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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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샌프란시스코 광장의 곰돌이 컬렉션을 보고는 마음을 바꾼다. 아바나에서 약 세 달 동안 세계 각국의 디자이너들이 만든 각 나라를 상징하는 곰돌이 전시가 열렸다. 나는 곰돌이 마니아기 때문에 그 전시를 세 번이나 보러갔다. 전통의상이나 그 나라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곰돌이에게 그려져 있었다. 한국과 북한도 있었다. 그는 쿠바 곰돌이가 맘에 들었는지 쿠바 곰돌이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쿠바 곰돌이 볼에 뽀뽀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확인한 후 맘에 드는지 나중에 메일로 꼭 보내 달라고 말했다. (인터넷에 그 사진을 올리면 죽여버리겠다고 나를 협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공식적으로 허락받은 유일한 알레의 얼굴 사진을 아바나에서 곰돌님 덕택에 찍게 되었다. 역시 곰돌이(예술)는 위대하다.



생각보다 아바나의 시간은 별거 없이 평화롭게 흘러갔다. 곧 떠나야 하는 시기가 왔다.


마지막 날은 아바나 모로성에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배를 타면서 짧은 말다툼했다. 그 전부터 심심찮게 그는 쿠바에 다시 오라고 날 종용했고 나는 그의 강요가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카르마도 싫었고 숙소를 힘겹게 구하는 것도 쿠바도 모두 지긋지긋했다. 어떤 날은 돌아오고 싶기도 하다가 또 어떤 날은 절대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번 씩 변덕스럽게 마음이 바뀌었다. 모로 성에 가는 길 말다툼을 계기로 절대 쿠바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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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해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로성 구경도 하지 않은 채 다 귀찮다는 듯 잔디밭에 누웠다. 한시간이 흘렀다. 나는 혼자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가 내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Stella, 돌아와."


평소와 달리 차분한 저음이었다. 그는 미친 망아지처럼 굴다가도 정말 중요한 순간, 선을 넘어가기 직전의 순간을 잘 포착하는 재주가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결정적인 말을 하는 능력이 있었다.


"잘 모르겠어, 알레. 쿠바에서 너무 힘들었어. 난 미친 사람처럼 매일 울고 화내고 너랑 싸우고 고통스러웠어."

"돌아와, Stella"

"우리를 봐봐. 맨날 미친 듯이 싸웠잖아. 기억 안 나? 여기서 마무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난 네가 돌아오길 바라고 있어. 돌아오면 우린 행복할 거야."

"모르겠어. 좋은 선택인지..."

"널 사랑해."

"뭐? 웃기지 마.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래도 널 사랑해. 그게 내가 아바나에 너와 함께 있는 이유야."

"모르겠어."

"모르겠으면 그냥 내 말 들어. 아무 생각하지 말고 돌아와."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여전히 난 내 마음을 잘 몰랐다. 돌아오고 싶기도 했고 돌아오고 싶지 않기도 했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부터 앙꼰해변의 개싸움들, 수많은 언쟁과 다툼, 나를 상처 주던 순간, 한 사람으로서 존중받지 못해 억울하고 분노했던 마음, 서로를 모욕하던 시간. 아바나의 평화롭고 애처로운 시간, 날 울고 웃게 했던 행복했던 순간, 무엇보다도 지금 내 눈앞에 그가 보였다. 강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신경쇠약에 걸려 보호해줘야 할 것만 같았던 연약한 알레. 사랑도 아닌 주제 사랑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나를 붙잡는 이 남자. 마음이 약해진다. 그렇게 오랜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알았어. 돌아올게. 대신 조건이 있어. 우리가 다시 싸우게 되면 당장 바로 떠날 거야."

"걱정하지마. 돌아오면 우린 행복할 거야."

"돌아온다는 게 널 사랑한단 뜻은 아니야."

"괜찮아, Stella. 그냥 돌아와.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내가 널 사랑하니까."


그렇게 나와 알레의 첫 번째 여행이 끝이 났다.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을 남긴 채 나는 멕시코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