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감정을 마주하다.
다시 돌아온 멕시코 칸쿤에서 쿠바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변명을 적어 내려갔다.
'돈이 없어서 원래 계획했던 여행을 충분히 하지 못 했어.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쿠바를 여행할 수 있을지 몰라. 알레 같은 사람을 만나 보통의 관광객이 알 수 없는 쿠바를 만나는 건 특별한 일이야. 한 달 더 여행이 지체된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어. 내가 쿠바로 가는 건 알레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야. 그냥 쿠바를 다 보지 못했어 그래서 쿠바를 가는 거야.'
4일 동안 아주 바빴다. 마트에 가서 세면도구, 화장품, 허니 머스터드소스, 비닐팩, 과자 그리고 가장 중요한 누텔라를 샀다. 처음 쿠바를 갈 때보다 짐을 넉넉히 챙기려고 큰 배낭에 야무지게 넣었다. 곧 생일인 알레를 위해서 시계를 하나 구입했다. 오래도록 진열장을 바라보며 고민한 끝에 메탈 소재의 파란빛이 감도는 시계 하나를 샀다. 원래 입고 다니는 옷과는 그닥 어울리지 않지만 그 시계가 맘에 들었다.
"쿠바에 두고 온 애인이라도 있는 거 아냐?"
장난스레 묻던 친구의 말에 알레를 떠올리며 다짐하듯이 말했다. 절대로 애인 같은 게 아니야. 그러면서 잔뜩 신이 나 쿠바에 돌아갈 준비를 했다. 현금도 넉넉히 뽑았다. 처음 여행 경비보다 2배 넘게 챙기고 비상금도 챙겨 넣었다. 한 달간 수모를 만회하려는 듯 준비물을 꼼꼼하게 챙기고, 자기 합리화 세트도 잊지 않지 않고 챙겼다. '알레 때문에 쿠바에 돌아가는 게 아냐.'
다시 돌아온 아바나는 낯설지 않았다. 다시 한 달 체류 비자를 받았다.
"Stella! 보고 싶었어!"
쿠바 공항에 날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다니! 알레는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와락 안았다. 그래, 그의 말대로 두 번째 여행은 행복할지도 몰라.
아바나에서 무섭게 분해된 인형 맞추기 총쏘기 게임을 하고 맥주를 간단히 한 잔 마셨다. 그가 갑자기 가시가 잔뜩 박힌 장미 한 송이를 내밀었다. 나는 당황스럽지만 고맙다고 버벅거리며 말했다. 그때까지 난 꽃에 감흥이 없는 로맨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아마 티가 났을 것이다.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번 여행에서는 저번에 못 가본 도시에 다 가보자!"
"좋아!"
첫 여행지는 아바나와 가장 가까운 비냘레스다. 산에 둘러쌓인 농촌 느낌이 물씬 난다. 밭과 들이 펼쳐져 있고 자전거를 타기 좋은 마을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용하고 목가적이다. 평화롭고 순박한 느낌에 그 도시가 아주 맘에 들었다.
우리의 숙소는 터미널과 꽤 거리가 떨어진 1층짜리 단독주택이었는데 방이 하나뿐인 독채였다.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하지만 걱정이 많으셨다. 얼마 전에 리모델링 공사에 돈을 아주 많이 쓰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를 받아주신 것 같다. 지난 여행처럼 너무 숙소비를 깎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첫날이니 파티를 하기로 했다. 밥을 먹고 가볍게 공연을 하는 바에 가서 굴을 마셨다. 알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어떤 중년의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그냥 나이가 많은 아저씨였고 불친절할 이유는 없어서 적당히 웃으며 장난쳤다.
"여행 왔어?"
"응. 오늘 왔어."
"혼자 온 거야? 같이 놀래?"
"아니. 괜찮아. 난 여자를 좋아해."
그러자 그 남자는 바로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렇게 혼자 깔깔대는 사이 알레가 돌아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에서 나와 광장으로 나가보니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알레와 여행을 하면 2~3일에 한 번은 꼭 춤을 추게 된다. 우리는 둘 다 정신줄 놓고 춤추는 걸 좋아했다. 형식도 없고 남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그런 막춤 말이다.
난 녀석에게 동화되어 뻥 뚫린 비날레스 광장에서 쿠바 사람과 어울려 평소처럼 춤을 추었고 세상 오지랖 넓은 알레는 그새 다른 한국인에게 접근해 같이 춤을 추자고 한다. 여자분은 당황한 기색으로 멀뚱히 서서 어색하게 거절을 하자 알레가 말했다.
"왜? 재밌어!! 내 친구도 한국인이야."
"억... 외국인인 줄 알았는데...."
굳이 원치 않는 나의 자기소개를 대신해줬다. 그래 한국인이라면 이런 광장에서 국적불명의 댄스를 추기가 쉽지 않지.
옆에 춤을 추시던 노년의 아저씨 한 분이 있어 나와 알레는 그 분과 함께 춤을 췄다. 점점 분위기는 무르익고 한창 재밌는 와중에 갑작스레 음악이 끊긴다. 쿠바 길거리에서는 9시만 되면 음악을 꺼버린다는 말이지. 이전 어느 숙소 여행자 책자에서 '비날레스에 가면 동굴 나이트클럽에 꼭 가야 한다.'는 글귀를 본 기억이 났다. 그래서 고민 없이 불나방처럼 우르르 사람들을 따라 그 동굴 나이트로 입성했다.
줄을 서고 있는데 누가 내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 놀러 왔어? 난 케이시(가명)야."
그녀는 키이라 나이틀리를 닮은 캐나다 여행객이었다. 머리를 질끈 묶고 펑퍼짐한 검은색 바지가 여행객임을 알려주지만 그래도 어딘가 세련된 인상을 풍겼다. 미소가 쿨했다. 친해지고 싶은 인상. 난 활짝 웃으며 소개를 했고 알레와 놀러 왔다고 했다. 재밌게 놀라고 하고 그녀는 먼저 들어갔다.
동굴 나이트는 확실히 인상적인 곳이었다. 조명이 낮게 깔린 동굴 하나를 통과하며 거짓말처럼 넓은 공터가 하나 나온다. 무대가 앞 쪽에 하나 있었고 그 무대 앞에는 돌로 만든 테이블과 탁자들이 놓여있다. 음악은 끝내주고 힙한 장소. 전체적인 조명은 어두웠고 뒤쪽에 넓은 바가 있어 끊임없이 술을 주문할 수 있다. 쿠바에서 본 거 중에 가장 클럽 같은 클럽이었다.
그 날 알레가 평소보다 좀 많이 마시긴 했다. 클럽 안에서 우연히 케이시와 다시 마주치고 자연스럽게 함께 놀게 된다. 폭주한 알레는 나와 케이시를 한 팔씩 끌어안고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었다. 그를 살짝 밀치며 케이시한테 '쟨 원래 정신 나간 놈이니 이해하라.'고 했다. 그녀가 웃었다. 사실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음악소리는 컸다. 우리는 한동안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끊임없이 춤췄고 정신 차려보니 무대 앞에 올라가 있었다. 아무 걱정 없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즐거웠다. 단언하건대 쿠바에서 보내는 최고로 신나는 밤이었다.
나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화장실이 입구 쪽이라서 거리가 꽤 있었다. 그리고 정말 그런 게 있나 보다. 무언가 싸한 느낌, 불길한 예감, 흔히 말하는 '촉'이란 거 말이다.
처음 춤을 추던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무대 뒤쪽 어두운 공간으로 홀린 듯 걸어갔다.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자리에 멈췄다.
알레의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한 달간 지겹도록 봐야 했던 뒷모습. 그는 날 기다려주지 않았다. 언제나 앞서 걸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다녔고 풍경 사진이라도 찍고 싶으면 어쩔 수 없이 그의 뒷모습도 함께 찍어야 했다. 그 익숙한 뒷모습이 케이시와 얼굴이 포개어졌다. 그들은 눈 앞에서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멈춘 듯 그 장면을 각인해버렸다.
생각해보면 다시 돌아온 나는 밥을 먹으며 알레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알레, 나는 네 여자친구가 아니고 너도 내 남자친구가 아니야. 우린 애인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메이트야! 그러니깐 누구든 만나고 싶으면 만나. 나도 그렇게 할 게."
그때마다 알레는 입을 삐죽거리곤 했지만 딱히 불만을 제기하지도 않았다. 상처 받고 싶지 않아 내가 만들어낸 그 힘없는 방어기제들은 그 순간 모든 힘을 잃었다. 그때서야 깨닫는다.
나도 알레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리고 알레를 만나기 위해 다시 쿠바에 돌아왔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