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던 막장이 모두 여기에
아마 작년 11월 달 경이었을 것이다.
늘 그렇듯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새로고침 하다가 재밌는 글을 발견했다. 악명이 높은 헨리 8세와 그 6명의 아내(!)에 대한 글이었는데, 꽤 재미있어서 다음 시리즈도 모두 보고 나서야 뒤늦게 잠을 청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나도 잘 몰랐어
그게 시작이었다.
막상 영국에 유학도 갔다 왔는데, 실토하자면 솔직히 그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타워 오브 런던? 아, 악명 높은 앤 볼린이 참수당한 곳이지. 그렇다면 런던탑에서는 옛날에 앤 볼린과 헨리 8세가 살았겠구나. 그럼 헨리 8세의 모든 부인들이 런던탑에 살았겠네?? 리처드 3세가 조카를 죽인 곳이라고 하던데 왜 하필 그런 곳에서 산 거지??? 이해할 수가 없네. 어쩌면 옛날 사람들은 좀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을지도..
나중에야 런던탑의 역사를 찾아서 알게 되었지만, 하여간 그 당시의 나의 지식은 딱 그 정도였다. 내가 살던 킹스턴 (Kingston) 은 헨리 8세가 살던 햄튼 코트와 매우 가까워서, 런던탑 보다는 주로 햄튼 코트를 가곤 했다. 히스토릭 로열 팔라스 (Hictoric Royal Palaces)라는 사이트에서 60파운드를 주고 멤버십 가입을 하면 1년 동안 무제한으로 지정된 궁전들을 관람할 수 있는데, 당시 난 이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 봄이면 꽃을 구경하러, 여름이면 이벤트 구경하러, 겨울엔 그림 구경하러... 그렇게 열심히 햄튼 코트만 누비고 다녔다.
여하튼 그런 커뮤니티 글을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 헨리 8세는 알겠는데 얘 아버지는 대체 뭘 했길래 저 개망나니짓을 그냥 내버려 둔 거야? 얘 엄마는? 아들이 며느리를 죽이는데 그냥 놔둔 거야?
이렇게 물음이 꼬리를 물으면서, 아들보다는 아버지의 인생과, 정확히 말해서는 아버지의 교육 방침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뭘 어떻게 했길래 아내를 2명이나 죽이는 사이코 아들이 나온 거지? 이건 부모 잘못인가 그냥 아들 천성이 글러먹은 건가.
시작은 단순했다
그렇게 헨리 7세라는 인물이 궁금해서 닥치는 대로 유튜브 BBC 다큐를 보고, 코멘트에 "네가 이 다큐를 좋아한다면 The Shadow of the tower 도 좋아할 거야!"라는 누군가를 위한 누군가의 댓글을 보고... 그렇게 열심히 드라마를 보고 나서 또 댓글에 "요즘 BBC의 Wolf Hall은 최고야!"라는 댓글을 보고 또 찾아서 열심히 시청하고...
그렇게 작년 겨울부터 지금까지 난 주말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역사 드라마를 즐기기 시작했다. 더러는 유튜브로 보기도 하고, 어떤 건 VPN, 혹은 요금제 구독, 아니면 구글로 열심히 서치 해서 어찌어찌 찾아서 보기도 하고... 주말은 늘 무계획이 계획이다! 이런 신조였는데 역사에 워낙 관심이 생기다 보니 주말뿐 아니라 평소에도 늘 이런저런 잡지식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가령 중세시대 귀족이나 왕족은 급할 때 볼일을 어떻게 봤을까 (가장 궁금했다), 당시 오물을 치울 시스템이나 상하수도 시설은 어떻게 돼있었나, 대체 첫날밤은 어떻게 치렀나 등등...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지 그런 잡지식만 모아놓은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또 열심히 찾아보곤 했다.
한국사는 닳도록 공부했지만, 사실 세계사는 중고등학교 때 제대로 배우질 못했다. 윤리 도덕시간에 여러 철학가들의 이름과 민주주의의 흐름을 배울 때 몇몇 사건들은 배웠지만... 생각해 보니 고대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시간 내서 배운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프랑스혁명 때에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가 죽은 것은 안다. 그 이후 나폴레옹이 등장해서 황제가 된 사건까지는 알지만, 그 중간에 다시 여러 번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는 걸 잘 모른다.
워낙 엘리자베스 2세가 유명해서, 영국에 여왕이 있었으며 이젠 그 아들이 왕이 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네덜란드, 스페인,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국가들도 아직 왕이 존재한다! 워낙 밑에서 일하는 총리들이 나랏일을 도맡아서 하기 때문에 모를 뿐이지, 유럽에는 생각보다 '입헌군주제' 국가가 많이 남아있다.
그토록 민주적이고 언론자유도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나라들이, 버젓이 왕을 데리고 사는 것이다. 그 이유가 뭔지, 난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중세 유럽의 왕족들은 서로 정략결혼을 해서,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서로 친척인 경우가 많다. 아이가 태어나고 세례를 받으면 그 순간부터 왕과 왕비는 적당한 혼처를 고민하게 된다. 왕자는 나라를 물려주고, 나머지 공주들은 이웃 국가와의 관계를 위한 철저한 정치 도구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로맨스도 거의 없고,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니 말도 안 통하고, 케미스트리라는 게 제대로 있을 리가 없다. 숱한 유럽왕실 드라마에서 왕이 그토록 바람을 피우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 때문이다 (물론 당시 왕비는 늘 임신을 한 상태였고, 기독교 가치관에서 임신 한 아내와 성관계를 하는 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다).
왕이 일찍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
평민 같았으면 부부사이에 아들이 없어도 "그냥 남동생이나 조카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뭐" 이럴 수 있지만... 왕의 입장에선 정말 심각한 문제다. 심지어 남동생도 없다면? 그야말로 국가적 재앙이다. 그들이 후사에 그렇게 목멜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가끔 나한테 덤벼드는 남동생을 참고 참다가 결국 죽여버려야 하는 처형 문서에 최종 서명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장미 전쟁에서 에드워드 4세가 그랬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서명하고 쉴 새도 없이 몇 달 전부터 준비해 왔던 유력 지방 귀족과의 정찬에 참석해야 한다.
저번에 배신을 때려서 다시 한번 용서해 줬지만, 이놈이 또 언제 내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 보기도 싫은데 알짜배기 영지와 군인들을 많이 데리고 있으니 가능하면 친하게 지내야 하는데... 정말 짜증 난다. 스트레스도 받았는데 이참에 먹는 걸로 풀어야지... 이러다 보니 고칼로리 음식이나 단 음식에 빠져서 이빨도 쉽게 빠지고, 쉽게 비만이 되어서 젊을 때부터 온갖 성인병에 시달리게 된다. 사는 게 이러다 보니... 그들의 삶이 좀 불쌍하게 느껴졌다.
이런 왕도 있고 저런 왕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왕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부족함이 없이 자란다. 하지만 헨리 6세처럼 심각한 정신질환에 평생 시달리기도 한다. 에드워드 4세나 리처드 3세, 그리고 헨리 7세처럼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힘과 주변의 도움으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다. 일종의 자수성가 왕이라고 할까? 물론 크든 적든 왕가의 피를 갖고 있으니 가능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는 뻔히 자기 어머니가 살아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둘째 남동생을 반역죄로 죽여야 했다. 그리고 그토록 신뢰하던 막내 남동생 리처드만을 믿고 숨을 거두지만, 그 남동생은 형의 유언을 배신하고 형의 아들을 모두 죽여버린 후에 자신 스스로 왕이 된다.
그렇게 리처드 3세가 되었지만 과연 본인은 스스로 떳떳했을까? 자기 조카들을 죽이고?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얼마 후에 정작 자기 아들이 허무하게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걸 본 후로 조금이나마 그게 자기 업보라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이런 악마 같은 왕도 자기 아들의 죽음과, 연이은 아내의 죽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니까.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 작품이 요크 가문을 까기 위한 선전적인 작품이었지만, 정작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명작이 된 이유도 그런 사람의 이중성 때문인 것 같다.
나랑 별로 크게 다르지 않네
이런 역사적인 지식과 함께 드라마를 보다 보면 나도 많이 배우게 된다. 그냥 사실로도 재미있지만, 드라마로 보다 보면 알고 있던 지식이 배우들과 함께 더 생생하게 기억이 된다고 할까? 뭐가 진짜고 뭐가 드라마적 허구인지 구분하면서 좀 더 건전하게 작품을 덕질(!)할 수 있어서 좋다.
당최 이해가 안 되었던 헨리 8세의 거듭된 이혼과 폭식이라던지, 엘리자베스 1세가 왜 죽어도 결혼을 안 했는지...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다가 덜컥 죽어버리고 어린 아들이 왕이 되면 또 어떤 난장판이 펼쳐지는지... 그리고 왜 왕은 자기 가족을, 친척을 자꾸 죽여야 했는지. 처음엔 좋은 왕이 되고자 했던 이 사람들이 왜 자꾸 흑화(!) 할 수밖에 없는지,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난 잘 다스리려고 노력했어! 신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난 나라를 위해 새로 태어났지. 많이 노력했어! 근데 왜 니들은 왜 자꾸 말을 안 듣는 거야? 다 죽여버릴 거야. 이렇게 된 건 다 선을 넘는 니들 때문이야... 이런 의식의 흐름이랄까. 그래서 다들 환호받으며 즉위했다가 말년엔 야유받으며 죽어가는 것 같다. 혹은, 죽임을 당하거나.
가끔은 그림 그리다가 시간여행
크게 잘못하지만 않으면 그렇게 야유받으며 죽을 일도 없고, 죽임을 당할 일도 없는 (그러리라 믿는다...) 나로서는 이런 역사 드라마들이 흥미진진한 모험이다. 현실 중세시대는 평균수명 30세 언저리에, 여자는 애만 낳고 죽도록 일하다가 죽고, 남자는 죽도록 일하다가 전쟁 나가서 죽는 게 현실인데... 그래도 사람들이 역사극을 보는 이유는, 아마도 현실에서 탈피하고 싶기 때문일 거다. 그게 아무리 큰 지옥도라도.
그래서 역사 드라마를 보는 건 나에게 좋은 자극제이다. 늘 그림만 그리다가, 그림 생각만 하다가 그림 이야기만 하다가... 정말 그림에 시달려서(!) 이젠 그림이라는 것에 지긋지긋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가끔 보고 싶던 역사 드라마를 보면 많은 영감도 받고, 지루한 스튜디오 작업의 활력소도 되고, 공부도 되어서 좋다.
한때 취미 부족에 시달려서 온갖 새로운 취미를 밖에서 찾아 나섰다. 하지만 역시 나는 나답게 방구석에서 드라마 전편을 주말 동안 몰아보며 온갖 잡지식을 찾아다니는 게 내게 딱 맞는 것 같다. 주말마다 볼 영화가 가득하니 늘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