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영국에서 건강하게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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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영국 하면 주로 어떤 생각이 들까?
나처럼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대영박물관이나 내셔널 갤러리가 먼저 떠오를 것 같다. 문학에 관심 있다면 셰익스피어나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같은 이름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자연과학에 관심이 있다면 뉴턴, 찰스 다윈의 이름을 빼먹을 순 없다. 대부분 그 모든 느낌은 긍정적이다.
부정적인 것도 만만치 않다. 늘 흐린 날씨에 맛없는 음식, 거리의 소매치기, 게다가 이런 자유민주주의 세계에서 아직도 왕과 여왕이 있는 나라라니.
긴 시간을 영국에서 보낸 것은 아니지만, 단연코 말할 수 있는 건 있다. 소매치기는 내가 그냥 조심하면 되고, 딱히 먹을만한 지역 음식이 있으면 집에서 만들어 먹으면 된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날씨만큼은 내가 어찌해도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결코 익숙할 수 없는 우울한 영국겨울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흐린 날은 운치 있어서 좋다고. 비 오는 날의 촉촉한 감성이 좋다고. 그래서 난 영국이 좋을 것 같다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영국의 겨울을 지내고 나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간다. 그만큼 내게는 영국의 겨울은 miserable 그 자체였다. 세상에, 그 긴 어둠이라니! 건조하고 밝은 한국의 겨울에 익숙했던 내게 유럽의 겨울은 충격이었다. 이런 길고 어두운 겨울날씨는 짧은 듯 긴 유학생활의 복병이다.
겨울이 오기 전의 영국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봄에는 집집마다 꽃이 피고 (꽃이 우리나라보다 빨리 핌), 덥지도 않고 습하지 않은 아름다운 여름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햇빛에 미쳐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렇게 사람들이 근처 공원에 누워서 지긋지긋한 지난겨울의 곰팡이를 태우듯(?) 앞뒤로 노릇노릇 굽다 보면, 가을이 천천히 찾아온다. 영국은 늘 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때문에 단풍색이 참 아름답다.
이렇게 11월 초에 가이포크스 나이트(Guy Fawkes Night)와 함께 불꽃축제를 즐기고 나면 급격히 낮이 짧아지면서 추워진다. 그렇게 밤이 길어지는 대신 재밌는 겨울 축제가 열리는데, 도심에선 Christmas market이나 Winter Wonderland 같은 이벤트가 열린다. 아쉬운 날씨 대신, 아기자기한 핸드메이드 소품이나 지역 특산물, 캔디나 쿠키 같은 디저트를 친구들과 같이 나눠먹는 즐거움이 있다. 이렇듯 크리스마스 마켓은, 영국인의 생존방식인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그리움
언젠가 내가 연고도 가족도 없는 런던에서 갑자기 사고 나서 죽는다면? 과연 가족들이 몇 시간 만에 올지 계산을 해봤다. 공항에 도착해서 보딩을 하기까지 최소 2-3시간은 걸릴 테고, 직항 비행기가 보통 12시간이다 (지금은 더 걸림).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 타고 와도 1-2시간은 걸린다. 최소 16-17시간은 걸린다는 걸 깨닫고, 여기 있는 동안엔 최대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막막함과 그리움을 아는지 엄마는 매일 아침 내게 카톡을 보냈다. 바쁠 땐 못 보기도 하고, 가끔씩 영상통화도 했다. 너무 귀찮게 해서 짜증 나기도 했지만 난 안다. 그런 귀찮은 안부카톡 덕분에 내가 잘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그럼에도 내게 결코 익숙하지 않을 것 같은 날씨, 사람들, 언어 때문에 늘 이방인이라는 외로움이 따라다녔다. 혹은 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몸은 안다, 이곳은 고향이 아니라고.
모든 게 익숙하지 않지만, 노력해 보는 이유는 어려움 끝에 종착지가 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졸업과 귀국이라는 종착지! 영국 살이가 맘에 들어, 혹은 일을 구하게 돼서 더 살게 되었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내가 못했던 것을 해낸 사람이다. 쉽지 않은 해외 생활을 좀 더 지혜롭게 즐기면서 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 대략 세 가지가 나왔다. 놀랍게도, 이건 우리나라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1. 걷는 자에겐 복이 있나니
해야 하는 일이 많고 머리가 복잡할수록 무작정 뛰어나갔다. 그리고 매일 킹스턴 강변을 걷기 시작했다. 며칠째 햇빛을 못 본 우울한 날일수록 더더욱 말이다.
그렇게 미뤄두고 무작정 걷다 보면 축축한 코를 들이밀며 내 옆을 빙글빙글 도는 귀여운 강아지도 보게 된다. 할로윈이 다가오는 우울한 하늘 아래, 알록달록한 꽃과 함께 할로윈 옷을 입힌 해골 모형을 갑판에 전시해 놓은 보트하우스도 보인다. 그냥 강변을 걷고 있을 뿐인데, 밥 주는 줄 알고 졸졸 따라다니는 오리 + 백조들이 좀 귀여워 보인다. 돌아오다가 교회 앞에서 간이 피아노를 치는 거리 음악가에게, 괜히 남아있는 동전 몇 개를 모자에 넣어준다. 동물도 사람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나도 열심히 해야지.
산책하고 나서 논문을 쓰는 게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걸 알고 난 이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의 매일 산책을 했다. 내 우울의 70%는 이 산책이 특효약이었던 셈이다. 덧붙이자면, 뛰면 더 좋다!
2. 나란 친구 잘 먹여주기
유학생 친구들은 대체적으로 두 부류로 나뉜다. 요리를 좋아하는 자, 그렇지 않은 자. 주식이 라면인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
처음에 나도 귀찮은 마음에 한인마켓에 가면 라면만 잔뜩 샀다. 그렇게 라면만 먹었는데, 점점 밀가루 음식 때문에 소화가 안 되고, 늘 소화제를 달고 살다가, 급기야는 소화제 3개를 털어놔도 잘 내려가지 않았다. 그 이후엔 열심히 밥을 지어서, 간단한 덮밥류를 김치, 야채와 함께 먹곤 했다.
영국 마켓이 좋은 점은 고기와 야채, 우유가 싸다는 거다! 친구들 데려와서 삼겹살이나 스테이크 파티를 해도 부담이 없다. 그리고 마살라 커리뿐만 아니라, 아예 마켓 한 코너가 인도 재료로만 채워질 정도로 커리랑 난을 많이 판다. 피자처럼 오븐에 구우면 되니까 간단하게 난을 데워서 커리에 찍어먹기만 해도 된다. 아침으로 퀘이커 브랜드의 오트밀을 우유에 부어 먹어도 따뜻한 한 끼 식사가 된다! 또띠아에 남은 야채와 닭고기를 둘둘 말아서, 근처 공원으로 훌쩍 점심 피크닉을 가도 좋다. 중동에서 자주 먹는 쿠스쿠스도 동네 마켓에서 정말 싸게 판다.
같은 기숙사에 살던 중국 메이트는 아예 이참에 베이킹을 마스터하기로 했는지, 매일매일 부엌에서 파이와 빵을 굽곤 했다. 먹어보라며 나눠 준 애플파이가 정말 맛있었다. 뿐만 아니라, 킹스턴 대학에서 취미반으로 가끔 쿠킹 클래스를 한다! 무료해지고 외롭기 쉬운 유학 생활에, 요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3. 친구는 다다익선
언어 공부하거나 유학하려면 한국인을 조심해야 한다는 얘긴 어디서 나온 걸까? 사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었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유학생 모두 마찬가지다.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가능한 많은 게 좋다는 생각이기에, 딱히 누굴 가려가며 사귀진 않았다. 이런 좁은 사회에서 가장 좋은 건, 두루 넓게 잡음 없이 지내는 거다. 가능한 편견을 가지지 않고, 다양한 곳에서 온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말 붙여서 친구가 되어주면, 다들 반긴다. 사실 모두 외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좁은 사회에서 같은 구성원 사이에 쉽게 뒷담을 하면 안 된다. 아마 다음날 당사자 귀에 들어갈 거니까. 정 답답하면 가족이나 형제에게 이야기하거나, 차라리 블로그에 비공개로 글을 적는 게 낫다. 이뿐만 아니라 기숙사에서 파티를 할 때, 혹은 생일 초대를 받을 때가 있다. 이땐 가능한 빈손으로 가지 말고 후식으로 먹을 과자나 디저트, 음료나 맥주라도 갖고 가자. 자잘한 돈거래가 있는데 딱 잘라서 계산하기 어려운 경우, 내가 약간 손해를 본다는 생각으로 내고 잊는 게 낫다.
초기부터 친구 간에 섭섭한 일이 생긴다거나 클래스 메이트 간의 갈등이 생기면 그게 졸업까지 영향을 준다. 행복한 유학생활의 70-80% 요소는 바로 인간관계이다. 오히려, 유학은 학과 공부가 아닌, 바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우는 진짜 공부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4. 영국이란 친구와 친해지기
영국의 환절기는 집안에만 있으면 딱 우울증 걸리기 좋은 그런 날씨다. 그럴 때마다 산책도 했지만, 매주 장소를 정해서 런던 시내로 놀러 가거나 교외로 떠났다. 같이 갈 친구가 있든 없든 말이다.
유학생활은 공부가 우선이지만, 또한 그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곳들을 샅샅이 둘러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유학생은 일종의 장기여행자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내가 보고 싶었던 런던 근교의 소도시나 공원, 고성들을 마음 놓고 볼 수가 없다. 영국은 버스와 철도가 잘 되어 있어서 뚜벅이 여행이 가능하다. 외식값이나 옷값을 절약해서, 그 돈으로 브런치를 간단하게 싸서 훌쩍 버스를 타보자! 덕분에 내 카메라 롤에는 다양한 영국 근교의 풍경들로 가득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