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아니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기필코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처럼, MBA를 하고 나면 한국이 아닌 곳에 취직을 하고 싶었다. 때는 2012년 말, 전 세계에 몰아닥친 경제위기는 내 상황도 비켜가지 않았고 마치 어겐 2006처럼 이력서를 몇백 군데 돌려도 줄줄이 낙방하는 그 악몽 같은 시간을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었다. 이름 있는 MBA를 했다고 해서 잡 오퍼가 줄줄이 따라올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나를 원하는 곳이 없을 줄은 몰랐다.
그 거절감이란.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찬란하게 걸린 파리의 하늘과는 달리 내 마음에는 잿빛 구름만 가득했다.
여러 군데 이력서를 내는 건 할 수 있었다. 차라리 밤새 이력서를 고치고 또 고치는 건 괜찮았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오는 rejection email로 땅끝까지 떨어지는 내 마음을 다 잡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똑같은 하루를 또 살아내는 건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에너지와 의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2013년 새해가 밝아오자 같이 유럽에서 취직을 꿈을 꾸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여기서 해볼만큼 해 본 것 같아. 여기선 안되려나 봐
파리는 너무 비싸서 이제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 것 같아
가족이 그리워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떠나갈 때, 내 인생의 한 챕터가 끝나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다. 내가 생각했던 MBA의 끝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매일매일 조금 더 초라해지는 내 모습을 스스로 지켜보는 건 너무나도 어렵기만 했다.
뭐라도 해야 되지 않겠어.
뭐라도 해보자.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면 내가 성취할 수 있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어느 날 문득 들었다.
그래서 뛰기 시작했다.
파리의 물결이 반짝이는 센강을 따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퐁네프다리를 지나고 파리를 그저 아름답게만 바라볼 수 있는 수많은 관광인파를 부러워하며 루브르 박물관까지 뛰었다.
힘들면 그냥 멈추면 될 것을, 나는 그냥 걸을까 하는 내 마음과 끊임없이 싸우며 한걸음만 더, 저기까지만 하며 뛰었다. 저기 빵집까지만 뛰자. 거기까지 뛰어도 죽을 것 같지 않다면 다음 신호등까지 뛰어볼까.
6km 남짓한 거리를 뛰는 동안 느껴지는 수많은 감정은 마치 그때 내 마음의 축소판 같았다. 그냥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멈추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달음을 내딛을 때마다 뒤 엉퀴는 그런 상태라고나 할까.
그렇게 버티다 보니 어느새 6월이었다.
졸업 전까지는 취직을 꼭 하고 싶었는데 결국 그러지 못했고, 엄마와 여동생이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서 파리로 왔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니 이젠 그냥 한국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6개월이나 했는데, 그냥 한국에 가서 가족 가까이 사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디어 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끊임없이 구직을 하고 있었는데 조금 색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기 시작했다.
지원하고 싶은 회사 웹사이트에 들어가 job opening이 있는지 찾아본다
Linkedin의 location과 keyword search기능을 이용해 그 job에 일할 법한 사람들을 검색한다
Linkedin의 inMail 기능을 이용해서 이메일을 보낸다
지난 6개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컨택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전 세계 모든 곳을 고려해봤다 - 심지어 버뮤다 같은 곳까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과 미팅도 셀 수없이 해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다 해보고 싶었다.
새로운 방법을 시도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싱가폴 어느 컨설팅 회사의 매니저가 답장을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