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독서가 남기는 한 가지

by jjin

책을 읽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실망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책을 읽었고, 그 순간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은 책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덮고 나면 이상하리만큼 빠르게 내용이 사라졌습니다. 며칠만 지나도 어떤 이야기가 핵심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고, 한 달쯤 지나면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기억력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집중을 못 해서 그런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아니면 원래 책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인가. 그렇게 이유를 나 자신에게서만 찾았습니다.


그때의 저는 누가 제게 "그 책 어땠어?"라고 물으면 말문이 막히곤 했습니다. 심지어 제가 책을 읽고 있는 중인데도,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습니다. 읽고 있으니 분명 머릿속에 들어와 있을 것 같은데, 막상 꺼내려면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냥 좋은 책이라는 말만 남고, 왜 좋았는지, 어디가 좋았는지는 흩어져 버렸습니다. 읽는 순간에는 분명 감동했는데, 그 감동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기록을 하며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아주 조용하지만 분명한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변화는 '기억력이 좋아졌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습니다. 예전에는 책을 읽는 내내 '이걸 기억해야 해', '나중에 써먹어야 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시간이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하려고 애쓰고, 놓치지 않으려고 붙잡고, 기억하지 못할까 봐 불안해했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하기 시작하자 그 불안이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안정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제는 읽고 남기고 싶다"는 마음을 처음 제대로 배우게 된 책이 있었습니다. 김선영 작가의 <나도 한 문장 잘 쓰면 바랄 게 없겠네>라는 책이었어요. 그 책을 읽고 나서 저는 블로그에 독후감과 서평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거창한 결심을 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책을 읽고도 금세 잊어버리던 내가, 이대로는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돌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은 제게 아주 현실적으로 말해줬습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으니, 한 문장부터 남기라고요. 그 한 문장이 독서의 끝이 아니라 독서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요.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떠오르는 생각을 여백에 바로 적기 시작하자 책이 이상할 만큼 술술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이해가 더 잘 되는 느낌이 들었고,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예전보다 더 집중해서 읽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힘이 덜 들었습니다. 마치 무거운 짐을 혼자 들고 가다가, 중간에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한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기록은 책의 내용을 대신 기억해 주는 안전장치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모든 문장을 붙잡으려 하지 않게 되었고, 그 덕분에 책 전체를 훨씬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기록을 시작한 뒤로 생긴 작은 습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책에 밑줄을 긋는 것만으로는 아쉬울 때가 많아서, 저는 인덱스를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붙이는 게 아니라, 색을 구분했습니다. '기억에 남길 것', '적용해 볼 것', '기록할 것', '감명받았던 것'처럼요. 그 작은 색깔들이 책을 읽는 제 시선을 정리해 줬습니다. 읽는 동안에는 감정과 생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인덱스를 붙이는 순간 "아, 나는 지금 이 부분을 이렇게 남기고 싶구나"가 또렷해졌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책을 덮은 뒤에도 그 색깔들이 제 기억을 다시 불러왔다는 사실입니다.


기록하지 않고 책을 읽을 때의 저는 늘 불안했습니다. 이 책이 중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수록 더 그랬습니다. '이건 그냥 흘려보내면 안 되는 책이야'라는 생각이 들면, 오히려 집중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책을 덮는 순간 대부분의 내용이 사라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장을 읽으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계속 조급함이 올라왔습니다. 그 조급함은 독서를 방해했고,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도 어딘가 허전한 기분을 남겼습니다. 분명 읽기는 했는데,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반면 기록을 하며 읽을 때는 그 불안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이 문장은 지금 내 마음에 남는다는 사실만 남겨두면 되었고, 나중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책을 읽는 태도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기억하려 애쓰는 대신 이해하려고 읽게 되었고, 이해하려는 대신 느끼려고 읽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읽은 책은 이상하게도 훨씬 오래 남았습니다. 내용을 하나하나 외우지 않았는데도, 책의 흐름과 핵심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기록을 하며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책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데서 독서가 끝났다면, 이제는 책이 던지는 질문 앞에 머무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한 문장을 읽고 그냥 넘어가지 않고, '이 말이 왜 지금 나에게 걸릴까', '이 장면이 내 삶의 어디와 닿아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록은 저에게 생각할 시간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책은 점점 제 것이 되어갔습니다.


책을 기록하며 읽다 보니, 저자의 언어가 조금씩 제 언어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책 속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는 데서 시작했지만, 점점 그 문장 옆에 제 생각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문장은 제 경험과 연결되었고, 어떤 문장은 오래된 기억을 불러왔습니다. 그렇게 기록된 문장들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제 삶의 맥락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떠올릴 때, 저는 책의 내용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읽던 당시의 저 자신을 함께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경험도 했습니다. 어떤 책을 다시 떠올릴 때, 책 속 이야기보다 먼저 제가 그 책을 읽으며 남겼던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왜 이 부분에서 멈췄을까', '이 문장을 읽고 이런 질문을 적어두었구나' 하는 기억들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지금의 나는 어떤 답을 하고 있는지도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책의 내용과 제 기록, 그리고 그때의 고민이 하나로 묶여 기억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인덱스를 붙이던 습관도 결국 그 지점에서 더 확실해졌습니다. 책을 다시 펼치면 글이 아니라 색깔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그 색깔을 따라가다 보면 그때의 나를 금방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 여기에는 내가 적용해보고 싶다고 표시해 뒀지.' '여기는 감명받아서 붙여놨구나.' '여기는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부분이었네.' 그리고 그 표시들 사이사이에 제가 적어둔 짧은 메모가 다시 말을 걸었습니다. 기록은 책의 내용을 단순히 저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책과 나 사이에 다시 대화를 열어주는 문이라는 걸 그때 더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기록은 책과 나 사이에 대화를 만들어주었고, 그 대화가 기억을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책을 읽고 나면 '이 책에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라는 막연한 느낌만 남았다면, 이제는 '그 책을 읽을 때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지'라는 구체적인 장면이 함께 떠올랐습니다. 기억은 정보로 남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남을 때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기억이 남기 시작하자, 독서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의 저는 책에서 실천할 것들이 나오면 '해봐야지' 하고 마음만 먹고 잊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라도 해보려고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거창한 변화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책 속에서 '적용해 볼 것'이라고 표시해 둔 인덱스를 다시 보면, 그 문장이 그냥 좋은 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나는 분명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고 표시해 뒀고, 그 표시가 현재의 나를 조용히 끌어당겼습니다. 기록은 나를 몰아붙이지 않았지만, 나를 다시 그 자리로 데려다 놓았습니다.


이렇게 책이 오래 기억에 남는 경험을 하다 보니, 저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책을 잘 기억하지 못했던 이유는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책을 대하는 방식의 문제였다는 사실입니다. 기억하려고만 읽었던 책은 오래 남지 않았고, 기록을 통해 생각하고 느끼며 읽었던 책은 자연스럽게 남았습니다. 기억은 억지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머물렀던 자리에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책을 읽을 때 욕심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모든 내용을 다 기억하려 하지 않았고, 모든 문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에서 나에게 남을 한 가지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한 가지만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한 문장이든, 한 질문이든, 한 감정이든 상관없었습니다. 그 한 가지를 붙잡는 순간, 책 전체가 훨씬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만 남기겠다고 마음먹자, 책은 더 많이 남았습니다.


기록은 책을 가볍게 읽지 않기 위한 무거운 의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책을 편안하게 읽게 해주는 장치였습니다.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고, 이해하지 못할까 봐 조급해하던 마음을 내려놓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책은 더 깊어졌고, 독서는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기록은 독서를 더 무겁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현실적인 변화도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누가 책 이야기를 물으면 대답을 못했는데, 이제는 책을 추천해 줄 수 있을 만큼 기억이 남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 어땠어?"라는 질문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줄거리 전체를 말하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적어도 한 문장, 한 장면, 내가 밑줄을 그었던 이유 정도는 꺼낼 수 있었습니다. 독서는 그렇게 ‘읽고 끝나는 것’에서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있다는 건, 결국 내 안에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제 책을 읽고 나서 그 책의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는지로 독서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어떤 생각을 했는가', '이 책은 나에게 어떤 질문을 남겼는가', '이 책을 읽던 나는 어떤 상태였는가'.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다면 그 책은 이미 충분히 제 안에 남아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그 답은 대부분 밑줄과 메모, 그리고 책장 사이에 꽂힌 작은 인덱스들 속에 남아 있습니다.


책의 내용을 오래 기억하는 비밀은 특별한 암기법에 있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책을 읽는 데에도, 더 집중해서 읽는 데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 비밀은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을 함께 기록하는 데 있었습니다. 책을 읽는 나의 생각, 감정, 질문을 남기는 순간, 책은 정보가 아니라 경험이 되었고, 그 경험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책을 읽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 많은 사람들은 책을 덮는 순간 또다시 불안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이걸 기억할 수 있을까', '남는 게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기억하려 애쓰기보다 단 한 줄만 남겨보시길 바랍니다. 이 책에서 나에게 남을 한 가지는 무엇인지, 그 한 가지만 적어보세요. 밑줄 하나여도 좋고, 여백에 적은 한 문장이어도 좋고, 페이지 끝에 작은 표시 하나여도 괜찮습니다. 그 작은 흔적이 책을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단지 책의 내용이 아니라, 그 책을 읽던 당신 자신을 오래도록 남겨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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