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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자 이름에 내 이름은 없었다

스스로를 실패자로 부르던 시절

by 서이담

내게도 꿈이 반짝이던 시절이 있었다. 고교 시절부터 전국 백일장과 크고 작은 공모전을 돌며 방송작가 혹은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꿨었다. 실제로 ‘글’을 써 대학에 가겠다는 당찬 포부가 있었고 ‘특기자 전형’을 통해 서울권 대학교에 진학했다.


지방에서부터 수도권 서울까지 글을 쓰고 상을 받는 재미로 삼 년의 시간을 보냈다. 글이 너무 쓰고 싶어 당시에 몇 없던 학원과 과외를 직접 알아봤고, 쓴다는 것, 표현하는 게 즐거운 일인지 몸 소 체감했었다. 이게 정말 되네? 대학교에 간 후에는 홍보대사, 기자단, 체험단 등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내가 가진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정확히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사람이 표현되기를 바랐다.

대학교 3학년 때 짧게 특강으로 끊은 스피치 학원을 시작으로 아나운서 준비를 했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뭘 하든 지지해 준 하나밖에 없는 조력자였다. 하고 싶다고 하면 빚을 내서라도 할 수 있게 도와주던 우리 엄마.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나를 무척이나 걱정했었다. 학원을 수강일에는 괜히 신이 났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뉴스톤과 잘 맞았으며 연습을 하면 할수록 소리가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새로 뜨는 공고, 공채를 보며 ‘저기 어딘가에 내 자리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언제가 빛나게 될 미래를 떠올렸다.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나는 당시 아카데미 종합반과 집중과정을 수료했다. 대학교는 일 년 휴학을 했기에 조바심이 났다. 빨리 졸업해야 된다와 동시에 취업해야 된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주변 친구들은 하나둘씩 취업계를 내거나 졸업과 동시에 회사에 들어갔다. 대기업 계열사 광고 회사, 작가, 공무원 각자의 속도와 방향에 맞게 사회생활이 시작된 셈이다. 나 또한 처음에는 방송사 공채를 준비하다가 경험을 쌓기 위해 작은 방송사부터 사내방송, 기업 방송 등을 지원했었다.


서류에서 떨어진 곳도 있었고, 서류는 통과했으나 카메라 테스트 혹은 시험 후 낙방한 곳도 있었다. 세상은 내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다.

졸업 후에는 더 마음이 조급해져 기상 스터디, 필기 스터디, 실기 스터디 등 다양한 스터디에 들었다. 그래 나는 언론고시 준비생이야 분명 될 거라는 믿음으로 버텼던 시절.


칠전팔기 끝에 합격한 누구누구, 존버가 승리한다는 말도 있는데. 내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이가 차고 앞이 불안하니 마음을 접었다. 정확히는 미련이 조금 있긴 했지만 플랜비도 있어야 했다. 당시 스물여덟, 적지 않은 나이다.


한 날은 스터디를 하며 이미지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다. 정확히는 대놓고 받은 셈이다. 솔직히 목소리나 말하는 건 지적할 게 없는데 살을 빼야 할 것 같다고. 누구보다도 그 사실은 당사자인 내가 잘 알았다. 나는 얼굴과 상체에 살이 잘 붙는 체질이어서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서 빼야 또렷해 보였으니까. 후에는 얼굴살, 체형, 이미지에 대한 말이 워낙 많았다. 한때는 얼굴을 깎아야 되나? 손봐야 되나?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게다가 나는 먹는 걸 워낙에 좋아하고, 행복해한다. 뼈를 깎는 고통으로 다이어트를 할 수 없다면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그간 들인 시간과 공이 아까웠다. 아카데미 수업이며 프로필 사진 비용, 의상 구매 비용 모든 시간과 비용이 하늘로 둥둥 날아갔다.


연이은 낙방과 불합격, 한 번 두 번은 경험이니까 다음 기회가 있겠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횟수가 늘어날수록 스스로를 패배자로 단정 지었다.

정확히 말하면 패배주의자가 맞았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책 속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이력서를 여러 번 수정해도 보낼 용기가 없었다. 함께 스터디했던 친구들이 하나 둘 방송국에 합격할 때면 공허한 자책이 나를 삼켰다. 나는 정말 안 되는 사람인가.


다시 시작한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용기가 없고, 포기하기엔 자존심이 남아있던 시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가장 낮은 곳에 있었다. 실패가 끝이 아니라 더 많은 사회가 남아있었는데 말이다.


플랜비로 어디든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글을 쓰며 블로그를 운영한 탓에 다양한 제품이나 체험 포스팅을 해왔다. 방향을 틀어 글과 콘텐츠 관련된 일은 어떨까. 차선책을 생각했다. 정말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었다. 지금 들어가도 스물여덟에 신입 딱지가 붙는다는 사실이 목을 조여왔다. 더 늦으면 아무도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함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웹에이전시라는 곳에 덜컥 합격했다.




ps. 경력자들도 결국 신입이었던 시절이 있고 많은 시행착오가 있는데요. 그동안 인하우스 회사, 제품 대본 작가, 방송국, 스타트업 등 여러 군데를 경험하면서 알게 된 생활들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꿈꾸는 일들을 하지 못하여 스스로 패배자라고 여겼던 날들부터 다시 힘을 내 시작했던 사회생활기를 적어보고자 합니다.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 신입 회사원들을 위해 여러 가지 회사 생활에 대한 희로애락 함께 나눠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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