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자리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다.
직장 생활을 한 이후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자꾸 용돈을 요구하신단다.
어떤 분은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가부장적 가족 위계의 최상위에 군림하시며
손 아랫 사람들의 온갖 불편함과 어려움을 양산하시고 있었다.
또 어떤 분은 손녀가 어릴 때 주던 용돈을, 손녀가 큰 이후 몇 배로 되돌려 받고 계신다.
- 살아계실 때 잘 해드리세요. 저는 외가, 친가, 다 합쳐서 할머니고 할아버지고
아무도 살아계신 분이 없어요.
나는 그냥 이 한 마디만 했다.
내게는 이 화제에 대해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정말로 없었으니까.
우리 외할머니는 내가 고3이었던 어느 여름 돌아가셨다.
그 때 아마 여든 넷이셨던 것 같다. 비슷한 날짜에 오누이들께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특별히 지병이 있으시진 않았고, 낮잠을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이모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셨다.
다만 돌아가시기 얼마 전, 온 지방에 흩어진 자식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셨고,
그 전날이 되어서는 깨끗하게 방정리를 하고 하얀 소복을 입으셨던 것이다. 기이하게도.
할머니는 원래 매우 깔끔한 분이셔서, 항상 방을 몇 번이고 쓸고 닦아 반질반질하게 만드시곤 했다.
그래서 나는 외가에 가면, 그렇게 할머니가 깨끗하게 만들어 놓으신 방에 군불을 때고,
먼지 걱정 없는 방바닥을 이리 저리 굴러다니며 등을 덥히는 것을 좋아했다.
깔고 누울 요 같은 것은 일부러 치워버렸다. 할머니의 맨질한 방바닥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그렇게 깔끔하던 분이었으나, 연세가 워낙 많아지시고 나니 청소횟수가 점점 줄어드셨다.
할머니 방에 먼지가 허용되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가 다시 청소를 시작하신 것이 정말 이상하게 느껴졌으리 만큼.
만일 할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나는 그분께 무엇을 해드릴 수 있고, 또 무엇을 해드려야만 했을까.
일단 생각나는 한 가지가 있다면, 할머니께 한글을 제대로 가르쳐 드리는 것이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어느날, 할머니가 내게 한글을 가르쳐달라고 하셨다.
어린 나는 할머니가 한글을 잘 모르셨던 게 그저 부끄럽고 짜증났던 것 같다.
일제 시대에 태어난 할머니가 가끔 일본어를 섞어쓰신다는 것을 보고,
그 시절엔 참 우여곡절이 많았단 것이나, 배움의 기회조차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겨우 초등학생 꼬맹이가 생각해냈을 리 없다.
꼭 지식으로 그 사람의 근면함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란 것도 그 때의 내가 알았을 리 없다.
그래서 그저 몇 번 알려드리다가는, 잘 따라하지 못하는 할머니께 역정을 내곤 했던 것이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참, 그저 어리다는 것이 나쁜 것이로구나라고 밖에는.
그리고 만일 할머니가 살아계시다면 나는 또 무얼 해드릴 수 있었을까.
대학교 졸업식에서 같이 사진을 찍었을까, 취직해서는 빨간내복을 사드렸을까.
아, 엄마랑 같이 온천 여행을 보내드리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다.
그리고 좋아하는 쌀과자 사 드시라고 얼마씩 손에 쥐어드리면,
할머니는 그것을 또 꼬박꼬박 모아서는
내가 올 때마다 내가 좋아할만한 다른 먹을 것을 사놓고 기다리고 계셨을 것이다.
아마도 그러셨을 것이다.
아니면 혹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외가집 찾아갈 때마다 드릴 용돈 생각에 부담부터 덜컥 되었을까.
그러나 아무튼 지금 내가 할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는
그분 산소 옆 화병에 꽂힌, 비바람과 먼지에 빛 바랜 오래된 조화들을
형광색의 새 것들로 교체하는 것 뿐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짐이 될 때가 있다.
그렇다더라도 세상에는 빨리 알게 될수록 좋은 것들이 있다.